2005년 출간된 동명 원작 소설은 ‘보그’를 모델로 한 패션지 ‘런웨이’에 입사한 사회초년생 앤디가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간다는 것을 큰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5개월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고, 패션업계에 핵폭탄 같은 파장을 남긴 건 직장생활의 애환을 감동적으로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화려한 패션쇼의 ‘런웨이’(원래 모델의 동선을 의미한다) 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대중-특히 젊은 여성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가 로렌 와이스버거가 주인공 앤디처럼 명문 코넬대학을 나와 1년 동안 ‘보그’ 미국판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비서로 일했다는 경력 때문에 소설 속의 ‘악마’ 편집장 미란다는 실제 안나 윈투어로 오버랩되고, 독자들에게는 소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효과를 낳았다.
출판시장 주요 장르가 된 ‘치크릿’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지 편집장은 패션업계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베라 왕, 조르주 아르마니, 베르사체 같은 수백명의 톱 디자이너들이 선물 공세를 펼치며, 에르메스 스카프를 냅킨처럼 쓰고, 휴가지에서 ‘흰색 스커트’가 필요하다고 하면 패션 담당 기자들의 전화를 받은 뉴욕의 전 브랜드가 흰색 스커트와 미란다 아이들의 옷을 비행기로 공수한다.
편집장뿐 아니라 패션에디터(기자)들과 비서들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엄청나다. 소설 속에서 비서 앤디가 공짜로 샤넬을 입고, 편집장이 ‘버린’ 명품들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다가 막판엔 퇴직금 대신 갖고 나와 중고명품숍에 넘긴다. 여느 나라 왕비나 영부인의 일이라면 ‘최악의 스캔들’이 되겠지만, 패션지 편집장에겐 ‘당연한 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오늘날 패션업계는 여자들의 ‘디즈니랜드’인 셈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패션업계를 포함하여 ‘미’를 상품으로 다루는 패션잡지사, 성형외과, 백화점, 모델 에이전트 등 ‘프리티 비즈니스’ 업계를 배경으로 주로 2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하는 이른바 ‘치크릿’(Chicken literature)은 전 세계 출판시장에서 이미 ‘주류’ 장르로 자리잡았다. ‘For Better, For Worse’를 쓴 캐롤 매튜, ‘Dirty Girls Social Club’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알리사 발데스 로드리게스, ‘Sushi for Beginners’의 매리안 케이 등의 소설은 쓰는 즉시 전 세계 수십개국 언어로 번역돼 팔려나간다. 미국이나 영국의 대형 할인점 안에 서점이 생긴 이유도 사실 ‘치크릿’에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치크릿’은 곧바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거나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진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에 이어 TV시리즈물로도 제작이 결정된 경우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인기 패널로 각종 토크쇼에 출연하여 젊은 여성들의 인생 카운슬러가 된다.
20, 30대 젊은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한 소설과 영화의 속성은 줄거리가 서로 다름에도 패션지 기자나 스타일리스트, 디자이너, 파티 플래너 등을 등장시켜 ‘프리티 비즈니스’의 안팎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따라서 작가 중에는 루이스 버그쇼 같은 패션지 기자, 로렌 와이스버거 같은 편집장 비서에서 패션지 별자리 심리상담가(제시카 아담스)에 이르기까지 ‘프리티 비즈니스’를 실제로 거친 내부인들이 많다.
영화에서 주인공 앤디는 ‘샤넬’을 협찬받아 뉴욕의 커리어우먼으로 변신한다.
그렇다면 ‘프리티 비즈니스’ 출신자들이 쓴 책들은 현실을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을까.
한 라이선스 패션지의 편집장은 “미국 ‘보그’의 편집장이 세계 패션 비즈니스를 좌지우지한다는 건 맞다. 그러나 안나 윈투어는 매우 실무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어 영화의 미란다(메릴 스트립)와는 아주 다르다. 미국 ‘보그’엔 영화처럼 전 세계 브랜드들이 무제한 협찬을 하지만, 한국에선 잡지사에서 촬영한 옷이나 상품이 파손되면 물어줘야 한다. 해외 패션쇼에서 에디터들이 한국을 대표하므로 ‘프런트 로(맨 앞줄)’에 앉고 출장 갈 때 옷도 잔뜩 싸가는 건 영화와 비슷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패션지 기자들에게 더 중요한 건 헝그리 정신”이라고 말한다.
“악마는 프라다, 천사는 샤넬을 입어?”
악마 같은 편집장 역을 맡아 아카데미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메릴 스트립. 극중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거장 발렌티노가 디자인한 것으로, 발렌티노는 카메오 출연도 했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씨는 “영화의 앤디처럼 아무 능력 없이 패션을 경멸함으로써 지적인 척하려는 사람을 보면 정말 화가 난다. ‘악마’ 편집장처럼 감각이 탁월하고, 똑똑하며 완벽하다면 존경심을 갖는 게 옳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이너서클’의 불만에도 ‘프리티 비즈니스’가 꽤 오랫동안 대량 소비시대의 ‘뮤즈’가 될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씨는 “‘프리티 비즈니스’는 환상을 파는 일이지만, 젊은 여성들이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한 패션지 편집장은 “‘아름다움’을 만들고, 그것을 평가하고, 파는 과정이 수공업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로 이뤄진다는 점이 ‘프리티 비즈니스’의 매력”이라고 설명한다.
‘뉴욕타임스’ 경제 칼럼니스트 버지니아 포스트렐이 올해 펴낸 ‘The Substance of Style’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가 ‘프리티 비즈니스’를 어떻게 성장시켰는지를 분석하면서, 현대의 소비 대중에게 ‘프리티 비즈니스’가 ‘진실한 자신의 표현’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의 분석이 아니라도 ‘프리티 비즈니스’는 눈이 확확 돌아갈 만큼 재미있는 세계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단돈 3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어떤 특수효과나 대사 없이 샤넬과 프라다의 로고를 비춰주는 것만으로 전 세계 여성들에게 똑같이 스펙터클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수익을 낸 ‘프리티 비즈니스’ 브랜드는 프라다가 아니라 샤넬이다. 샤넬은 늙은 ‘악마’에게 단 한 벌의 옷도 주지 않고, 젊은 앤디(앤 해더웨이 분)에게만 많은 의상을 협찬해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는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