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코엑스에서 열린 ‘명화 속의 과학여행전’에 작품 전시를 초대받은 한지선의 부스.
매운 가스야 날리든 말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든, 알싸한 테레핀유(油) 냄새가 밴 서양화과 작업실을 굳건히 지키던 한지선(43)의 20대는 단순했고 또한 뜨거웠다. 1981년 대학(홍익대)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품었던 꿈은 더러 인정받지 못하거나, 출중한 선후배와 견주어 차이지는 것만 같던 자신의 재능에 좌절과 부침을 거듭하며 한 조각 붉은 마음(一片丹心)으로 담금질됐다.
10여 년 전 이맘 무렵의 그를 또 기억한다. 기억이란 종종 일련의 사건보다 한 장면으로 응축되어 남기도 하는데 그날이 그랬다.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 마주친 그녀는 예의 검은 옷차림이었고 가죽 재킷과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는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지만 핸드백에서 나온 건 ‘무기’급 용품들이어서 놀랐던 장면이다. 화장용 파우치며 여성용품들이 있어야 할 그 속엔 붓 외에 칼이며 톱, 작은 망치와 본드 등속이 노트와 책, 스케치북들과 엉켜 있었다.
“캔버스만 붙들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됐네요. 알다시피 홍대는 한다 하는 이들이 모인 데라서 학부 땐 열심히 하느라 했어도 빛이 안 났다고들 해요.(웃음) 옛날의 제 그림을 아는 이들은 드로잉 위주의 그림을 ‘주구장창’ 그려대던 저를 떠올리고 전시장을 왔다가 사인도 받아가고 두 손을 잡아주고 가곤 하더라고요.”
겨울 칼바람이 매섭던 12월 첫날, 서울 코엑스 인도양홀 전시장(과학기술부 지원 사비나미술관 기획, ‘명화 속의 과학여행전’)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 옛날 세종문화회관 뒷길에서와 똑같은 차림이다. 변한 게 있다면 세월뿐인 듯 외양은 그대로인데 정작 놀랄 만큼 달라진 것은 그림이었다. 가없는 길, 하늘로 혹은 아래를 향한 계단, 벽과 계단 사이에 단절을 용납하지 않는 창(窓)이 있으며 ‘쉬엄쉬엄 전시장을 둘러보고 내려놓을 수 있다면 지쳤을 영혼마저 내려놓으라’는 듯, 그런 의자가 있는 그림.
계단과 건물, 벽을 통한 작품으로 이상세계 추구
전시장에 걸린 ‘길(A road)’이라는 표제를 모두 단 작품들은 100호 안팎의 대형이다. 만만히 볼 크기가 아닌 작품 속 공간을 칼로 벼르고 톱으로 잘라 누비조각처럼 이어 붙인, 목재를 다룬 품에 일단 한숨부터 쉬어지는 것이다. 작품 안에는 주재료로 다룬 합판뿐 아니라 숨은 그림이나 미로 찾기처럼 켜켜이 장치된 온갖 오브제들이 제 몫을 하고 있다. 입체이면서 동시에 평면이기도 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2002년 성곡미술관 전시부터 선보였다고 했다.
한지선의 작품 ‘길’, 122×75cm, 나무 위에 혼합재료를 사용한 부조 회화다.전시에서 돌아온 작품이 없었으면 목재소를 연상케 할 경기도 분당의 작업실 풍경(왼쪽부터).
노 평론가는 평을 통해 한지선의 작품을 ‘계단을 다루는 미술가는 현재 달리 예가 없든가 지극히 소수에 속하는데 그중 한 명’으로 점찍으며 우리가 미술교과서를 통해 보았던 작가들과 비교해 거론했다. 즉 유트릴로가 그린 파리의 돌계단이나 한지선의 입체작품에서 보이는 수평 수직의 의미 부여를 몬드리안에서 찾는다거나,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전함 포템킨’까지를 아울러 한지선의 작업을 설명한 것은 이를테면 노평론가다운 우회적 찬사이겠다.
한지선의 ‘길’은 그가 한결같듯 늘 벽과 함께였다. 벽은 현실이고 길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출구일 것이다. 회화와 조각과 저부조(低浮彫), 평면과 입체와 설치가 혼재했으나 경계가 없는 작품은 도리어 완숙해 보인다. 돌과 콘크리트, 시멘트와 벽돌로 마감된 듯한 건물과 길들은 회색도시의 그것처럼 인공미를 가장하고 있지만 기실 그림은 따뜻하다 못해 다분히 문학적이다. 마리 로랑생이나 샤갈의 그림에서 몽환을 느끼듯 기하를 바탕에 깐 입체임에도 어딘가 초현실적이어서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신화 속 도시는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원래 한지선은 ‘생활 이미지’ 시리즈로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다. 대학원을 마치고 90년 미국으로 유학, 이후 99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과 한국에서 가졌던 9차례의 전시는 ‘생활 이미지’에 매달려 산 그녀의 30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팽팽했던 피부에 그늘이 지는 동안 ‘생활 이미지’들은 그의 젊음으로 인해 뿌리내리고 깊어졌으며 튼실해졌다.
80년대 후반 한국 화단은 신표현주의와 페인팅이 대세였다. 한지를 두껍게 겹배접한 위에 수채화의 느낌을 주는 아크릴 물감으로 표현한 그녀의 초기 작품들이 회화의 감성적 아우라로 감상자를 이끈다는 평단의 얘기를 들으며, 페인팅만으로는 부족한 ‘2%’의 그 무언가가 갈급(渴急)했고 캔버스가 지닌 평면의 속성마저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석고나 철제, 모래 같은 물감이 아닌 오브제들이 점차 ‘생활 이미지’를 메워갔다. 하여 98년 가을, 서울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미국 체류 중 마지막 전시가 되었던 그녀의 작품을 보았을 땐 이미 사각 캔버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평면이라 부르기엔 버겁고 입체라 하기엔 좀 헐거운, 회화이면서 부조(relief)의 옷을 입은 한지선의 작품은 그를 기점으로 이즈음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길’ 시리즈로 접어든다.
전시에서 돌아온 작품이 없었으면 목재소를 연상케 할 경기도 분당의 작업실 풍경.
“살면서 중요한 것은 과정, 또 다른 길 준비”
'길' 49 X 69cm, 2004
그녀의 ‘자화상’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어야겠다는 것. 99년, 네 살 난 아이만 데리고 귀국 비행기에 오른 것은 이를테면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다. 2002년 남편이 한국지사(브룩스코리아 상무)로 발령이 나 비로소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때까지 한지선의 생활은 육아와 작품 외에 어느 것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길’ 시리즈의 경우 20호 크기의 작품을 만드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립니다. 자는 시간만 빼고 온종일 한다고 쳐도 그만큼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에요. 그러니 아이 외에 다른 일은 꿈도 못 꿨어요. 살면서 제일 보람도 있었고 힘도 들었던 시기랄까. 지치고 힘들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많이 그리웠어요.”
97년 작고한 부친(한명석)은 자식을 먹이고 교육하는 생물학적 의미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예술가로서 한지선의 ‘얼’을 심어주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서재는 언제나 볼거리가 빼곡했던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4녀1남의 자식을 키우며, 사업이 흥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한 명에게도 모자람 없이 풍부한 문화적 소양을 경험하게 해주었던 분이다. 한지선의 작업이 일련의 건축적 조형성을 띠게 된 까닭 역시 아버지로부터다. 부친의 절친한 친구였던 건축가 고(故) 김수근이 어린 시절 그녀에게 준 영향이 ‘길’ 안에 오롯이 녹아 있는 것.
그림 외에 홍익대와 숙명대, 성신여대에 출강하고 있는 한지선에게 다가오는 2007년은 또 다른 ‘길’이 열리리라 예감한다. 12월29일부터 두 달간 열릴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 ‘꿈길을 걷다’를 비롯해 거의 매달 기획 초대전이 연이어 있다.
경기도 분당의 작업실에서 사진 촬영이 끝났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휘어져 감도는 계단이나 계단을 지탱하는 철제난간이 결코 강건해 보이지는 않는 그녀의 두 손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손을 만져본다. ‘전사’의 손이다. 가늘고 거칠지만 뜨거운 손. 한 손에 톱을, 또 다른 손엔 망치를 들고 선 그의 모습에서 보이는 건 ‘미다스’요 ‘아마조네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