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원숭이는 새끼를 업어서 키운다.
동물의 삶에 호기심을 느낀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아마도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서 본 ‘동물의 왕국’이 실마리가 된 것 같다. 지금도 “세렝게티 초원의 얼룩말은…”이라는 성우의 내레이션이 선히 귓가를 맴돈다.
온천욕을 즐기는 일본원숭이.하위계급의 일본원숭이는 성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위를 하기도 한다(위).<br>송영관 사육사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아래).
첫 일탈도 동물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원비를 빼돌려 쌈짓돈을 마련한 뒤 용인행 시외버스에 오른 것. 호랑이와 사자를 보기 위해 떠난 초등학생 3명의 ‘어드벤처’는 홍콩영화보다도 스릴 있었다.
수은주가 뚝 떨어진 12월6일 다시 에버랜드의 사파리를 찾았다. 추위 앞에서 ‘밀림의 제왕’ 사자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까치가 날아와 먹이를 가로채는데도 보온용 열선이 깔린 바위 위에 몸을 찰싹 붙인 채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수컷 등에도 올라타고 ‘까불지 마라(?)’ 훈계
스물여섯 마리가 함께 생활하는 다람쥐원숭이는 바위 위의 사자와는 정반대로 호들갑스럽게 나무를 타고 있었다. 원숭이들은 야생에서도 쉴새없이 무슨 일인가를 한다. 바닥에 깔아놓은 대팻밥을 손으로 찢고 이빨로 씹는 원숭이들의 표정이 앙증맞다.
오늘의 주인공인 다람쥐원숭이는 영장목 감는꼬리원숭잇과의 포유류다. 사람을 포함해 우리가 보통 ‘원숭이’로 통칭하는 동물은 모두 영장목에 속하는데, 이 목은 11개의 ‘과’와 53개의 ‘속’으로 이뤄져 있다.
고릴라 무리의 대장 ‘실버백’(위).<br>기린의 보스는 권력을 잡은 뒤 목이 더 길어진다(아래).
영장목 사람과로 분류되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영장목 성성잇과의 침팬지로, 인간과 침팬지의 관계는 침팬지와 고릴라, 원숭이의 관계보다 훨씬 가깝다.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적 요소는 98~99% 비슷하다.
사회를 이루어 살면서 서열을 뚜렷하게 유지하는 영장목의 동물들은 지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눈, 코, 입도 사람 못지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장목 동물들의 사랑과 권력투쟁은 맹수들의 그것보다 사람을 더 많이 닮았다.
다람쥐원숭이 무리의 대장은 일곱 살(사람으로 치면 약 35세)의 수컷 홍만이다. 열여덟 마리의 어른 원숭이와 일곱 마리의 새끼 원숭이를 다스리는 홍만이는 다른 원숭이보다 덩치가 컸다. 몸집이 커서 대장이 된 걸까, 아니면 대장이 된 뒤 덩치가 커진 걸까.
영장목 성성잇과에 속하면서 침팬지 다음으로 사람과 가까운 고릴라의 대장은 ‘실버백’이었다. 실버백은 등이 은백색 털로 뒤덮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정권을 잡은 고릴라는 등쪽의 털이 은색 또는 회색으로 변하곤 한다. 권력을 장악하면서 털색이 럭셔리하게 바뀌는 것이다.
홍만이의 우람한 허우대도 대장이 된 뒤에 커진 것이다. 동물 중에는 권력을 잡은 뒤 회춘해 겉으로 드러난 체격이 좋아지는 종이 적지 않다. 예컨대 보스 한 개체가 모든 암컷을 독식하는 기린의 경우, 우두머리에 오른 기린은 목이 더 길어지면서 무리 가운데 제일 긴 목을 자랑한다.
“다람쥐원숭이는 왕위에 오르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체격이 커집니다. 덩치가 일종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죠. 사람도 권력을 갖게 되면 ‘더 큰 것’으로 자신을 돋보이려고 하잖아요. 다람쥐원숭이는 몸으로 권력을 보여주는 셈입니다.”(송영관 에버랜드 사육사)
다른 수컷들보다 10cm가량 큰 홍만이는 쉴새없이 후배위 자세로 다른 수컷에게 올라탔다. 혹시 양성애자? 다람쥐원숭이의 몸길이는 암컷 23∼29.5cm, 수컷 25∼37cm인데 홍만이가 올라탄 수컷은 덩치가 왜소해 암컷처럼 보였다.
동성간의 성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이 행위의 정체는 무엇일까. 홍만이가 거쳐간 수컷들은 오줌을 싸곤 했다. 정말로 양성애자? 마운팅이라고 불리는 이 행동은 서열이 낮은 원숭이에게 ‘내가 너보다 높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일종의 ‘훈계 행동’이란다.
다람쥐원숭이는 좀처럼 가만있질 못한다.
사람도 ‘권력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문화권별로 다양한 기제를 사용한다. 권력자가 나타나면 고개를 숙이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하위 계급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잔소리를 하는 행위도 권력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라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다람쥐원숭이 암컷들은 ‘다 큰 새끼’를 업고 다니는 것으로 세를 과시한다. 봄에 발정해 여름에 새끼를 낳는 다람쥐원숭이의 모성애는 다른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하다. 다람쥐원숭이는 한배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1년가량 새끼를 업어서 키운다.
성적 매력 있는 암컷 권력 상층부 차지
‘쌍둥이 엄마’ 튼튼이는 두 명의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다람쥐원숭이는 무리의 우두머리만 암컷과 ‘러브’를 할 수 있다. 엄마의 가슴패기를 파고드는 두 아기 원숭이의 표정이 평화롭다.
원숭이가 쌍둥이를 낳을 확률은 사람보다 낮다고 한다. 쌍둥이의 아빠는 물론 무리의 암컷들을 독차지한 홍만이다.
튼튼이의 팔뚝은 또래 암원숭이보다 굵고 단단했다. 새끼 두 마리를 늘 업고 다녔기 때문인데, 굵은 팔뚝 덕에 튼튼이는 서열도 높다. 8월에 태어난 이 아기 원숭이들은 다람쥐보다 조금 컸으며, 어미의 품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어미가 새끼들이 홀로 쏘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암컷 다람쥐원숭이의 전성기는 3~8세로 이 즈음이 수태가 가장 잘 이뤄진다. 암컷의 권력관계는 생식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성적으로 매력적인 암컷이 권력 피라미드에서 상위를 차지한다. 보스가 총애하는 암컷이 사실상의 2인자 노릇을 하는 종도 있다고 한다.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11세짜리 다람쥐원숭이의 모습은 튼튼이와는 달리 처량해 보였다. 후미진 곳에서 대팻밥을 찢고 있었는데, 손아귀 힘이 영 시원치 않았다. 송 사육사는 “측은해 보여 따로 먹이를 챙겨주는데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면서 안타까워했다. 권력관계에서 밀려나면 몸도 눈에 띄게 약해지는 모양이다. 사람은 어떤가.
보스에 찍혀 하위계급으로 밀려난 원숭이는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거나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야생에서 원숭이는 몸이 아파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리에서 약자로 찍히면 피라미드의 최하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튼튼한 척, 힘 있는 척하는 것은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도 매한가지다.
원숭이의 권력다툼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섹스와 먹이에서 비롯한다. 과일, 채소, 곤충, 닭고기 등 하루에 1개체당 6.5kg의 먹이가 주어지는 터라 먹이와 권력의 상관관계는 비교적 약하다. 그러나 밀웜(딱정벌레 에벌레)처럼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특식이 주어질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젊은 수컷들 순종하며 권력 도전 호시탐탐
홍만이가 좋아하는 밀웜은 그가 배불리 먹은 뒤에만 다른 원숭이들이 접근할 수 있다. 야생에서 원숭이는 절대 먹이를 양보하지 않는다. 원숭이는 동물원에서도 경쟁적으로 먹이를 입으로 밀어넣는다. 만약 사육사가 먹이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으면 하위계급부터 굶어죽는다.
다람쥐원숭이 커뮤니티의 새끼 원숭이는 모두 홍만이의 자식이다. 다른 수컷 원숭이들은 수년 동안 섹스를 하지 못했다. 10년 넘게 권력을 잡는 원숭이들도 있는데, 장기 집권이 이어지면 다른 원숭이들은 평생동안 ‘러브’를 한 번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홍만이는 경쟁자들을 일찌감치 거세함으로써 장기독재의 기반을 구축해놓았다.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려는 욕구는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디엔에이(DNA)에 각인된 본성이다. 본성을 억누르면서 수도승 같은 금욕생활을 강요당하는 원숭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사람의 힘으로 그들의 기갈을 풀어주면 좋지 않을까. 그러나 송 사육사는 인위적으로 짝을 붙여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람쥐원숭이의 세계는 맹수들보다 더 ‘군림’과 ‘순종’의 메커니즘에 따라 돌아갔다. 암컷들의 몸이 달아오르는 내년 봄의 필사적인 승부를 준비하는 몇몇 활기찬 수컷들도 철저히 홍만이에게 순종했다. 암사자 비너스의 제국을 무너뜨린 수호랑이 십육강처럼 이들 중 하나가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을까(‘주간동아’ 563호 참조).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면서도 이상한 제도가 일부일처제다. 쿠데타를 예비하고 있는 수컷들은 아마도 무리의 암컷 모두를 호령하는 세상을 꿈꿀 것이다. ‘만물의 영장’ 인간을 금수와 한 범주에 넣는 일은 온당하지 않겠지만, 취재 목적으로 들른 한 성인나이트클럽에서 목격한 ‘사람의 짝짓기’는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