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서파(庶派)였다. 그 자신이 서자라는 말이 아니다. 그의 직계를 거슬러 올라가 서자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은 서파가 된다. 조선시대에 서파라는 것은 관료로서의 출세 길이 막힌다는 것,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스스로 태어나기로 결정해 이 세상에 온 사람은 없다.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된다는 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사소절’ ‘관독일기’ 등 많은 저서 남겨
벼슬이 최고의 가치라 하고는 ‘너만은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그 차별이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이 차별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깨닫고, 분노하고 좌절한다. 술과 도박에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탕진한다. 그리하여 ‘서자는 할 수 없다’는 평가를 스스로 얻고 만다.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도 있다. 분하지만 참고 단정한 길을 걷는다. 이덕무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덕무 역시 과거공부를 하고 34세 되던 해 가을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하지만, 이것은 그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관료로서의 길을 일찍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덕무의 행로는? 그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에 단정한 삶을 산다. 그가 남긴 모든 문자는 그가 얌전하게 처신하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가 일상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꼼꼼하게 정리한 ‘사소절(士小節)’을 보면, 평생 조심조심 살아갔던 그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이렇게 자신을 다독여도 이따금 가슴속에서 슬픔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관독일기(觀讀日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밤에 희미한 달빛이 은은히 비치고, 뭇 벌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더니 이내 또록또록 들린다. 등불은 가물가물하는데, 말없이 홀로 오뚝 앉아 있노라니, 강개(慷慨)한 감정이 겹겹이 생겨나고 까닭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아마도 가을의 기운이 장부(丈夫)의 뻣뻣한 창자를 단련시키려고 하여 이런 것인가 보다.
희미한 달빛과 풀벌레 울음소리에 강개(慷慨)한 감정과 까닭 없는 슬픔이 솟구친다. 가을 기운을 핑계대지만, 이것이 어찌 가을 기운 때문이랴. 소외된 인간의 심사가 아닌가.
이덕무는 직업이 없었다. 정식 직업이라 부를 만한 것은 39세 되던 해(정조 3년, 1779) 얻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자리였다. 이전의 그는 백수였다. 농사꾼도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에 사는 그에게는 농토가 없었다. 또 약질이라 농사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덕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
반쪽짜리 양반 이덕무에게 책 읽기는 모순이다. ‘책을 읽으면 선비이고, 벼슬을 하면 대부(讀書曰士, 從政曰大夫)’란 말이 있듯, 독서란 곧 관료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이덕무의 독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여기서 오로지 지적 행위로서의 독서가 생겨난다.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책 읽기! 과연 이덕무는 오로지 책 읽기 자체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목적 없는 책 읽기라 해서 과연 목적이 없을 것인가.
나는 늘 예나 지금이나 인가(人家)의 자제들이 밀랍을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화려하고 높은 책상을 두고, 그 옆에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들을 빽빽하게 진열해놓고서, 자신은 머리에 복건(幅巾)을 쓰고 흰 담요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기침이나 캉캉 뱉다가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다.
좋은 서재에 책을 쌓아두면 뭐 하나?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다. 부귀한 인간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 점잖은 이덕무도 이런 인간에게는 결코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위의 이야기에 이어 이덕무는 맹자와 양웅(揚雄)을 인용한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깝다.”(맹자)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비록 걱정거리가 없다 한들, 금수가 될 것이다.”(양웅) 이덕무는 맹자의 ‘가르침’과 양웅의 ‘배움’이 바로 독서라고 말한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귀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이덕무에게 독서는 곧 인간이 되는 길이다. 나는 독서하는 이덕무에게서 지금 세상에서 거의 멸종된 ‘교양인’의 모습을 본다.
스스로 책 읽는 바보 ‘간서치’라 불러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책 읽는 바보’, 간서치(看書癡)라 불렀다. 그가 초년에 쓴 자전 ‘간서치전(看書癡傳)’은 아주 짧다. 같이 읽어보자.
남산 아래 바보가 살았다. 눌변이라 말을 잘하지 못했고, 성격이 졸렬하여 세상일을 알지 못했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해도 뻐기지 않았고, 오직 책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도 더위도 주림도 아픈 줄도 아주 몰랐다.
글을 막 배웠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손에서 옛글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지내는 방은 아주 좁았다. 하지만 동쪽 남쪽 서쪽에 모두 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가 옮겨가면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쪽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 예전에 보지 못한 책을 보게 되면 기뻐 웃으니,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는 곧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곤 하였다.
그는 두보(杜甫)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해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혹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看書癡)’라 해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스물한 살 때의 이야기니 요즘으로 치면 대학 2학년이다. 대학 2학년이 이토록 책을 읽다니 책 읽지 않는 학생들은 반성할 일이다. 어쨌든 이렇듯 책에 빠진 인간이었으므로 그는 천지간의 책을 다 보고야 말겠다는 애교 있는 과대망상증을 보인다. 24세 때 쓴 ‘갑신제석기(甲申除夕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성현들이 남기신 경전과 이런저런 믿을 만한 역사책들 속에 푹 잠겨 헤엄치듯 그 책들을 읽어내어 오묘한 이치를 얻어내고야 말리라. 그리고 그 밖의 패관야승(稗官野乘)과 잡가(雜家)의 말을 섭렵한다면, 천지간에 가득한 책을 거의 다 보아낼 수 있을 것이다.” 호서가, 독서가는 알 것이다. ‘천지간의 서적을 다 보겠다’는 말이 얼마나 무모한 욕심인지. 하지만 그 욕심은 정녕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듯 책탐(冊貪)에 빠진 이덕무는 그 욕심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오직 읽는 것뿐이었다.
나는 세상사에 대해서는 손방이다. 하지만 오직 시서(詩書)를 모으는 일에는 마음을 두고 있다. 그래서 남의 책 수백 권을 빌려 좌우에 가지런히 쌓아두고 있다. 혹 읽을 책을 계속해서 빌리지 못하게 되면, 장부(帳簿)나 달력이라도 싫어할 줄을 모르고 뒤적이며 읽었다.(‘갑신제석기’)
장부나 달력이라도 보기를 마지않는다는 말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 때 읽을거리에 굶주린 나는 책을 빌리기 위해 싫어하는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반나절을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가장 부러운 집안은 대궐 같은 부잣집이 아니라 책이 많은 집이었다. 가난한 이덕무는 책을 살 돈이 없으니, 빌리고 베끼는 것이 책탐을 푸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기에 책을 빌려주지 않는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만권(萬卷) 장서를 두고도 빌려도 주지 않고 읽지도 않고 햇볕을 쪼이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하자. 빌려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않은 것이요,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 것이요, 햇볕에 쪼이지 않는 것은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사군자(士君子)라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빌려서라도 읽어야 하나니, 책을 묶어놓고 읽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세정석담(歲精惜譚)’]
스스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짓이요, 자신이 읽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세상도 다를 바 없다. 어떤 사람은 무슨 귀중한 책을 가지고 있노라 자랑하다가 보자고 청하면 난색을 표하고, 유명 도서관에서는 귀중본이 있다고 목록에 밝히고는 ‘귀중본’ 도장을 쾅쾅 찍어 너무 귀중하여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책 빌리고 빌려주는 예의에 관한 기록도 남겨
이덕무의 편지를 보면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허다하게 나온다. 이런 이덕무이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대한 예의가 없을 리 없다. 그는 ‘사소절’에서 책을 빌리는 예의에 대해 일장 설교를 늘어놓는다. 몇 가지를 보자. 책을 빌려주는 것의 기본 정의다.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그 사람의 뜻과 사업을 키워주는 것은, 남에게 돈과 재물을 주어 그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해주는 것과 같다.” 어떤가. 책을 빌려주는 것은 남에게 재물을 주어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자선이 없다.
하지만 남에게 책을 빌려주기를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의 책이나 시문(詩文), 그림은 보고 난 뒤 빌려주기를 청할 것이며,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억지로 빼앗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요즘도 통하는 말이다. 좀더 읽어보자. 남의 책을 빌리면 정하게 읽거나 베끼고 기한 내에 돌려주어라. 기한을 넘기거나 주인이 독촉하는데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지켜야 할 예의는 이것뿐이 아니다. 남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책이나 장정이 안 된 서화를 빌려서는 안 된다.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원작이 손상될 수 있는 탓이다. 빌려준 사람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남의 책을 빌렸을 경우, 책주인이 만약 호고(好古)하는 사람이라면, 그 책의 오류처를 바로잡아 종이쪽지에 따로 써서 그 곁에 붙여두어야 할 것이다. 함부로 책 본문에 마구잡이로 어지러운 글씨로 적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의 책을 빌렸을 경우, 다 읽은 뒤 다시 먼지를 털어 차례대로 정돈하고 보자기에 싸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법서(法書)를 빌려서 베낄 경우는 다른 책보다 더러워지기 쉬우니, 더욱 마음을 써서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이덕무는 이렇게 책을 빌려 읽고 거창한 지식을 쌓았다. 지금은 책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독서하는 교양층은 얇아지고 인문서는 팔리지 않는다. 참으로 걱정이다. 이덕무 역시 베이징에 간다. 다음 호에는 이덕무와 베이징의 책 이야기를 해보자.
‘사소절’ ‘관독일기’ 등 많은 저서 남겨
벼슬이 최고의 가치라 하고는 ‘너만은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그 차별이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이 차별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깨닫고, 분노하고 좌절한다. 술과 도박에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탕진한다. 그리하여 ‘서자는 할 수 없다’는 평가를 스스로 얻고 만다.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도 있다. 분하지만 참고 단정한 길을 걷는다. 이덕무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덕무 역시 과거공부를 하고 34세 되던 해 가을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하지만, 이것은 그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관료로서의 길을 일찍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덕무의 행로는? 그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에 단정한 삶을 산다. 그가 남긴 모든 문자는 그가 얌전하게 처신하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가 일상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꼼꼼하게 정리한 ‘사소절(士小節)’을 보면, 평생 조심조심 살아갔던 그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이렇게 자신을 다독여도 이따금 가슴속에서 슬픔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관독일기(觀讀日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밤에 희미한 달빛이 은은히 비치고, 뭇 벌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더니 이내 또록또록 들린다. 등불은 가물가물하는데, 말없이 홀로 오뚝 앉아 있노라니, 강개(慷慨)한 감정이 겹겹이 생겨나고 까닭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아마도 가을의 기운이 장부(丈夫)의 뻣뻣한 창자를 단련시키려고 하여 이런 것인가 보다.
희미한 달빛과 풀벌레 울음소리에 강개(慷慨)한 감정과 까닭 없는 슬픔이 솟구친다. 가을 기운을 핑계대지만, 이것이 어찌 가을 기운 때문이랴. 소외된 인간의 심사가 아닌가.
이덕무는 직업이 없었다. 정식 직업이라 부를 만한 것은 39세 되던 해(정조 3년, 1779) 얻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자리였다. 이전의 그는 백수였다. 농사꾼도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에 사는 그에게는 농토가 없었다. 또 약질이라 농사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덕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
이덕무의 저서 ‘사소절(士小節·위)’과 ‘아정유고(雅亭遺稿)’의 본문.
목적 없는 책 읽기라 해서 과연 목적이 없을 것인가.
나는 늘 예나 지금이나 인가(人家)의 자제들이 밀랍을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화려하고 높은 책상을 두고, 그 옆에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들을 빽빽하게 진열해놓고서, 자신은 머리에 복건(幅巾)을 쓰고 흰 담요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기침이나 캉캉 뱉다가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다.
좋은 서재에 책을 쌓아두면 뭐 하나?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다. 부귀한 인간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 점잖은 이덕무도 이런 인간에게는 결코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위의 이야기에 이어 이덕무는 맹자와 양웅(揚雄)을 인용한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깝다.”(맹자)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비록 걱정거리가 없다 한들, 금수가 될 것이다.”(양웅) 이덕무는 맹자의 ‘가르침’과 양웅의 ‘배움’이 바로 독서라고 말한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귀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이덕무에게 독서는 곧 인간이 되는 길이다. 나는 독서하는 이덕무에게서 지금 세상에서 거의 멸종된 ‘교양인’의 모습을 본다.
스스로 책 읽는 바보 ‘간서치’라 불러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책 읽는 바보’, 간서치(看書癡)라 불렀다. 그가 초년에 쓴 자전 ‘간서치전(看書癡傳)’은 아주 짧다. 같이 읽어보자.
남산 아래 바보가 살았다. 눌변이라 말을 잘하지 못했고, 성격이 졸렬하여 세상일을 알지 못했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해도 뻐기지 않았고, 오직 책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도 더위도 주림도 아픈 줄도 아주 몰랐다.
글을 막 배웠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손에서 옛글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지내는 방은 아주 좁았다. 하지만 동쪽 남쪽 서쪽에 모두 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가 옮겨가면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쪽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 예전에 보지 못한 책을 보게 되면 기뻐 웃으니,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는 곧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곤 하였다.
그는 두보(杜甫)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해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혹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看書癡)’라 해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스물한 살 때의 이야기니 요즘으로 치면 대학 2학년이다. 대학 2학년이 이토록 책을 읽다니 책 읽지 않는 학생들은 반성할 일이다. 어쨌든 이렇듯 책에 빠진 인간이었으므로 그는 천지간의 책을 다 보고야 말겠다는 애교 있는 과대망상증을 보인다. 24세 때 쓴 ‘갑신제석기(甲申除夕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성현들이 남기신 경전과 이런저런 믿을 만한 역사책들 속에 푹 잠겨 헤엄치듯 그 책들을 읽어내어 오묘한 이치를 얻어내고야 말리라. 그리고 그 밖의 패관야승(稗官野乘)과 잡가(雜家)의 말을 섭렵한다면, 천지간에 가득한 책을 거의 다 보아낼 수 있을 것이다.” 호서가, 독서가는 알 것이다. ‘천지간의 서적을 다 보겠다’는 말이 얼마나 무모한 욕심인지. 하지만 그 욕심은 정녕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듯 책탐(冊貪)에 빠진 이덕무는 그 욕심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오직 읽는 것뿐이었다.
나는 세상사에 대해서는 손방이다. 하지만 오직 시서(詩書)를 모으는 일에는 마음을 두고 있다. 그래서 남의 책 수백 권을 빌려 좌우에 가지런히 쌓아두고 있다. 혹 읽을 책을 계속해서 빌리지 못하게 되면, 장부(帳簿)나 달력이라도 싫어할 줄을 모르고 뒤적이며 읽었다.(‘갑신제석기’)
장부나 달력이라도 보기를 마지않는다는 말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 때 읽을거리에 굶주린 나는 책을 빌리기 위해 싫어하는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반나절을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가장 부러운 집안은 대궐 같은 부잣집이 아니라 책이 많은 집이었다. 가난한 이덕무는 책을 살 돈이 없으니, 빌리고 베끼는 것이 책탐을 푸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기에 책을 빌려주지 않는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만권(萬卷) 장서를 두고도 빌려도 주지 않고 읽지도 않고 햇볕을 쪼이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하자. 빌려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않은 것이요,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 것이요, 햇볕에 쪼이지 않는 것은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사군자(士君子)라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빌려서라도 읽어야 하나니, 책을 묶어놓고 읽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세정석담(歲精惜譚)’]
스스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짓이요, 자신이 읽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세상도 다를 바 없다. 어떤 사람은 무슨 귀중한 책을 가지고 있노라 자랑하다가 보자고 청하면 난색을 표하고, 유명 도서관에서는 귀중본이 있다고 목록에 밝히고는 ‘귀중본’ 도장을 쾅쾅 찍어 너무 귀중하여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책 빌리고 빌려주는 예의에 관한 기록도 남겨
이덕무의 편지를 보면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허다하게 나온다. 이런 이덕무이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대한 예의가 없을 리 없다. 그는 ‘사소절’에서 책을 빌리는 예의에 대해 일장 설교를 늘어놓는다. 몇 가지를 보자. 책을 빌려주는 것의 기본 정의다.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그 사람의 뜻과 사업을 키워주는 것은, 남에게 돈과 재물을 주어 그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해주는 것과 같다.” 어떤가. 책을 빌려주는 것은 남에게 재물을 주어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자선이 없다.
하지만 남에게 책을 빌려주기를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의 책이나 시문(詩文), 그림은 보고 난 뒤 빌려주기를 청할 것이며,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억지로 빼앗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요즘도 통하는 말이다. 좀더 읽어보자. 남의 책을 빌리면 정하게 읽거나 베끼고 기한 내에 돌려주어라. 기한을 넘기거나 주인이 독촉하는데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지켜야 할 예의는 이것뿐이 아니다. 남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책이나 장정이 안 된 서화를 빌려서는 안 된다.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원작이 손상될 수 있는 탓이다. 빌려준 사람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남의 책을 빌렸을 경우, 책주인이 만약 호고(好古)하는 사람이라면, 그 책의 오류처를 바로잡아 종이쪽지에 따로 써서 그 곁에 붙여두어야 할 것이다. 함부로 책 본문에 마구잡이로 어지러운 글씨로 적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의 책을 빌렸을 경우, 다 읽은 뒤 다시 먼지를 털어 차례대로 정돈하고 보자기에 싸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법서(法書)를 빌려서 베낄 경우는 다른 책보다 더러워지기 쉬우니, 더욱 마음을 써서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이덕무는 이렇게 책을 빌려 읽고 거창한 지식을 쌓았다. 지금은 책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독서하는 교양층은 얇아지고 인문서는 팔리지 않는다. 참으로 걱정이다. 이덕무 역시 베이징에 간다. 다음 호에는 이덕무와 베이징의 책 이야기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