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자료나 정보를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읽어내야 한다.’ 이것이 통합논술을 치르는 모든 학생들에게 던져진 화두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어진 대상이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TV 드라마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줄거리를 그대로 쫓아간다. 드라마 제작자의 의도에 충실히 순응하는 셈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TV는 ‘바보상자’임이 틀림없다. 이런 방식의 TV 보기는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TV를 ‘천재상자’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를 염두에 두고 다음 글을 보자.
가령 만화만 하더라도 그것이 한 컷짜리 만평이든, 장면의 연쇄가 이어지는 극화이든 독자는 보는 행위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인 시간성을 주관적,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따라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고 지연시킬 수도 있다. 시간을 중지시킨다는 것은 매체 감응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산출하는 행위로 작용한다. 즉, 시간을 멈추게 하는 행위는 그 정지된 시간 위에 머무르는 행위를 연이어 낳기 때문이다. 이때 머무름은 독자들에게 감응 대상에 대한 섬세한 반성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만화는 공간의 사이(틈)가 있다. 한 칸과 다음 칸 사이의 여백 혹은 선이 그것이다. 그 틈은 물론 물리적 면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작은 공간은 동시에 아주 광활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이 되는 까닭은 그 공간이 머무름의 시간이 안착하는 공간이기에 그렇다. 머무름, 즉 반성적 성찰은 그때까지 본 서사나 사건의 전체 혹은 각 대목을 다시 반추하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며 때로는 그것을 위해 시간을 역진해 나가기도 한다.
- 이성욱의
이 글은 만화의 형식을 창의력과 관련지어 쓴 글이다. 즉, 컷과 컷 사이의 작은 틈을 독자가 창의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틈은 독자에게 만화의 그림과 내용을 자신의 주관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 된다. 이른바 이 공간에서 비판력과 창의력이 태어나는 셈이다. 우리 학생들도 매스컴을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를 올바르게 수용하기 위해 ‘만화의 틈’을 활용하면 어떨까?
우선 TV의 경우 만화와 같은 틈이 없다. 드라마는 시작과 끝이 시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방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의 특성상 한 회에 중요한 갈등이 표출되게 마련인데, 이 또한 일방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전해질 따름이다. 굳이 시청자들이 자위를 삼는다면 다음 회가 시작되기까지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져 시청자들이 창의적 사고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청자가 드라마 중간에 인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가령 드라마 방영 시간이 20분이라고 하자. 시청자는 10분 간격으로 드라마를 보고 이를 바탕으로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을 자신과 관련지어 그 속에서 현실적인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시청자 자신의 의지로 머무름의 시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시청자에게 30초 정도의 머무름의 시간은 무한한 창의력을 일깨운다. 이는 만화의 사이(틈)를 통해 머무름의 공간을 확보한 것과 같다. 시청자가 자의적으로 설정한 이 공간은 그 드라마를 비판적, 창의적으로 시청한 것이기에 절대 무비판적인 수용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TV 드라마보다 더 큰 한계를 갖는 구조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한 번에 상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상영 시간 중에 머무름의 공간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TV나 영화의 머무름 공간의 확보와 그 과정은 수용 주체의 비판력과 상상력을 키워줌과 동시에 지성과 심미성을 무한대로 넓혀줄 수 있다. 이런 창의적 방법이 TV라는 ‘바보상자’를 ‘천재상자’로 만들 수 있다.
학생들이여, 정보가 범람하는 현대에는 맑은 물을 뽑아내는 자기만의 머무름의 시공간이 필요하다. 그 시공간은 물리적으로는 짧고 좁지만 정신적으로는 무한히 길고 넓다. 학생들에게 이런 시공간의 확보는 잠자는 창의성을 깨울 수 있다. 즉 주체적 머무름의 확보라는 사고방식을 가질 때 사회문화의 부정적 현상에서 긍정적인 현상을, 반대로 긍정적 현상에서 부정적 현상을 재생산해낼 수 있다. 특히 이런 사고방식은 상식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쭉정이 논술답안을 자신의 생각을 담는 알곡 답안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가령 만화만 하더라도 그것이 한 컷짜리 만평이든, 장면의 연쇄가 이어지는 극화이든 독자는 보는 행위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인 시간성을 주관적,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따라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고 지연시킬 수도 있다. 시간을 중지시킨다는 것은 매체 감응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산출하는 행위로 작용한다. 즉, 시간을 멈추게 하는 행위는 그 정지된 시간 위에 머무르는 행위를 연이어 낳기 때문이다. 이때 머무름은 독자들에게 감응 대상에 대한 섬세한 반성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만화는 공간의 사이(틈)가 있다. 한 칸과 다음 칸 사이의 여백 혹은 선이 그것이다. 그 틈은 물론 물리적 면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작은 공간은 동시에 아주 광활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이 되는 까닭은 그 공간이 머무름의 시간이 안착하는 공간이기에 그렇다. 머무름, 즉 반성적 성찰은 그때까지 본 서사나 사건의 전체 혹은 각 대목을 다시 반추하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며 때로는 그것을 위해 시간을 역진해 나가기도 한다.
- 이성욱의
이 글은 만화의 형식을 창의력과 관련지어 쓴 글이다. 즉, 컷과 컷 사이의 작은 틈을 독자가 창의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틈은 독자에게 만화의 그림과 내용을 자신의 주관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 된다. 이른바 이 공간에서 비판력과 창의력이 태어나는 셈이다. 우리 학생들도 매스컴을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를 올바르게 수용하기 위해 ‘만화의 틈’을 활용하면 어떨까?
우선 TV의 경우 만화와 같은 틈이 없다. 드라마는 시작과 끝이 시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방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의 특성상 한 회에 중요한 갈등이 표출되게 마련인데, 이 또한 일방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전해질 따름이다. 굳이 시청자들이 자위를 삼는다면 다음 회가 시작되기까지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져 시청자들이 창의적 사고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청자가 드라마 중간에 인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가령 드라마 방영 시간이 20분이라고 하자. 시청자는 10분 간격으로 드라마를 보고 이를 바탕으로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을 자신과 관련지어 그 속에서 현실적인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시청자 자신의 의지로 머무름의 시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시청자에게 30초 정도의 머무름의 시간은 무한한 창의력을 일깨운다. 이는 만화의 사이(틈)를 통해 머무름의 공간을 확보한 것과 같다. 시청자가 자의적으로 설정한 이 공간은 그 드라마를 비판적, 창의적으로 시청한 것이기에 절대 무비판적인 수용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TV 드라마보다 더 큰 한계를 갖는 구조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한 번에 상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상영 시간 중에 머무름의 공간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TV나 영화의 머무름 공간의 확보와 그 과정은 수용 주체의 비판력과 상상력을 키워줌과 동시에 지성과 심미성을 무한대로 넓혀줄 수 있다. 이런 창의적 방법이 TV라는 ‘바보상자’를 ‘천재상자’로 만들 수 있다.
학생들이여, 정보가 범람하는 현대에는 맑은 물을 뽑아내는 자기만의 머무름의 시공간이 필요하다. 그 시공간은 물리적으로는 짧고 좁지만 정신적으로는 무한히 길고 넓다. 학생들에게 이런 시공간의 확보는 잠자는 창의성을 깨울 수 있다. 즉 주체적 머무름의 확보라는 사고방식을 가질 때 사회문화의 부정적 현상에서 긍정적인 현상을, 반대로 긍정적 현상에서 부정적 현상을 재생산해낼 수 있다. 특히 이런 사고방식은 상식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쭉정이 논술답안을 자신의 생각을 담는 알곡 답안으로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