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화백일주. 동아DB
우리 역사에도 수도원과 유사한 기관이 있다. 고려 사찰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는 왕권의 정당성을 불교에 의존했다. ‘호국 사상’은 국가 수호와 이어졌고, ‘미륵 신앙’은 왕을 성스러운 존재로 신격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미륵 신앙은 미래에 출현해 세상을 구원할 부처인 미륵불(彌勒佛)을 믿는 것으로, 궁예는 미륵불임을 자처하며 왕권 강화에 나서기도 했다.
“술 아닌 차(茶)라고 해야 마셔”
유럽 수도원과 고려 사찰은 술 문화 발달과도 연관성이 깊다. 서양 기독교 문화에서는 포도주를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신성한 음료로 인식했다. 그 결과 수도원에서 와인 제조와 소비가 정당화됐다. 또 당시 수도원은 농업 기술을 전파하고 토지를 관리하는 복합 경영체이기도 해서 와인을 대량생산해 판매하는 등 적극적인 상업 활동으로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고려 사찰에서도 술을 빚어 마셨다. 다만 유럽 수도원과 달리 술을 ‘곡차(穀茶)’나 ‘반야탕(般若湯)’이라고 부르며 세속적 음주와 구분했다. 곡차는 곡식으로 만든 차, 반야탕은 지혜의 탕이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술을 약용으로 음미한다는 인식이 반영돼 있다. 불교 계율은 음주를 금하지만, 한국 불교에는 의약적 목적과 수행 보조를 위해 술을 빚어 마시는 문화가 형성됐다. 조선 중기 고승인 진묵대사는 “술을 차(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술을 세속적 향락 목적으로 마시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고려 사찰은 여행자, 순례자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곡차를 함께 냈는데, 이때도 술은 예법의 일부였다.
그러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불교를 억압했다. 사찰 수를 줄이는 ‘억불정책’에 따라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낮아졌다. 술 문화 역시 타격을 받았다. 사찰에서 곡차 빚기는 조선의 정책 기조에 따라 위축되다가 종국엔 금지됐다.
하지만 산간이나 오지에 위치한 사찰에서는 곡차 빚기가 은밀히 이어졌다. 대표적 사례가 전북 모악산의 수왕사다. 이곳에서는 솔잎, 송홧가루, 오미자 등으로 만드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주조법이 비밀리에 전수됐다. 고산병 예방, 건강 증진 등 목적으로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송화백일주를 아예 차라고 부르면서 외부 단속을 피했다.

백련 맑은술. 신평양조장 홈페이지
조선·일제강점기 거치며 위축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전통주 전반이 단속과 통제의 대상이 됐다. 특히 집에서 술 빚기를 금지하는 ‘가양주 단속령’이 시행되면서 사찰 술 문화가 한층 더 위축됐다. 다만 이때 역시 깊은 산속 사찰에서 소량씩 빚어 약용으로 소비하던 술 일부는 명맥이 유지됐다. 이 술들은 광복 이후 전통 문화 복원 흐름 속에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앞서 언급한 송화백일주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호로 지정된 벽암스님이 주조법을 복원해 무형문화재로 등재되는 데 기여했다. 충남 당진 신평양조장에서는 김용세 명인(식품명인 제79호)이 고려 사찰의 백련곡차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해 백련 맑은술, 백련 막걸리 등으로 재탄생시켰다. 고려 사찰의 향기가 담긴 이 술들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천년의 시간을 넘어온 문화의 향연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