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화폐이자 자산이다. 스페인 한 동굴에서는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 금 유물이 발견됐고, 이집트인은 금을 신 또는 사후세계와 연관 지어 파라오 무덤에 함께 넣기도 했다. 또 기원전 1500년쯤부터는 금이 국제무역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마신 술은 ‘하계명주’ 추정
![동명왕릉에 있는 주몽과 유화부인 벽화. [위키피디아]](https://dimg.donga.com/ugc/CDB/WEEKLY/Article/67/b7/c6/96/67b7c6960a2fd2738276.jpg)
동명왕릉에 있는 주몽과 유화부인 벽화. [위키피디아]
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를 건국한 부여의 시조 해모수다. 어머니는 하백의 외손녀인 유화부인이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는 “해모수가 물가에 있는 유화부인을 보고, 말채찍으로 땅을 한 번 그으니(馬鞭一畫地) 구리집이 세워졌다(銅室忽然時). 비단 자리를 눈부시게 깔아놓고(錦席錦熙熙) 금 술잔에 맛있는 술을 따라(金觴置淳旨) 서로 마시고 취했다(對酌還經醉)”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유화부인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주몽이다.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금 술잔에 따라 마신 술은 과연 무엇일까. 일단 소주는 아니다. 소주는 1231년 몽골이 현 이란에 자리 잡은 이슬람 호라즘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연금술사(증류기술자)를 잡아온 데서 비롯됐다. 즉 고려시대에 몽골을 통해 들어온 술이 소주로 삼국시대, 특히 탄생 설화와 연결되는 시점에는 소주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소주가 아니라면 막걸리나 청주를 마신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당시 문헌상 탁주와 청주를 규정짓는 명확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탁주, 청주, 소주 등 정확한 술의 명칭은 고려시대 말 등장한다. 다시 말해 막걸리나 청주를 마셨더라도 그 술이 그렇게 불리지는 않은 것이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어떤 술을 마셨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주몽 생일이다. 주몽 생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다. 그렇다면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함께 술을 마신 시기는 음력 7월(양력 8월)일 개연성이 크다. 삼국시대에는 계절마다 다른 종류의 술을 즐겼는데, 그중 한여름에 마시는 술이 하계명주(夏鷄鳴酒)였다.
532~549년 무렵 중국 북위 고양군(현 산둥성) 태수였던 가사협(賈思勰)이 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 ‘제민요술’에 하계명주가 등장한다. 한자를 풀면 여름 하(夏), 닭 계(鷄), 울 명(鳴)으로, 여름에 닭이 울기 전 완성되는 술이라는 뜻이다. 황혼녘에 빚어 다음 날 완성되는, 말하자면 즉석 술이다. 덥고 습한 날씨에 빠른 알코올 발효로 만들어지는 일일주인 것이다.
계명주로도 불리는 하계명주는 이후 허준 ‘동의보감’에 등장했다. 1951년 1·4 후퇴 때 평안남도 강동군에 거주하던 고(故) 장기항의 어머니 박채형이 오늘날 경기 남양주로 피란하면서 챙겨 온 기일록(忌日錄: 집안 제삿날을 기록한 일지)에 제주(祭酒)로 사용한 계명주 제조법이 담겨 있어 198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금 술잔, 변치 않는 사랑 의미
하계명주를 금 술잔에 따라 마셨다는 사실이 특별한 이유는 금이 동서양을 막론해 아주 오래전부터 중요하고 귀한 물질로 여겨졌다는 점 때문이다. 성경 속 성막과 성전 기구 중 상당수가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신에게 바치는 제물 혹은 와인을 담글 때도 금이 사용됐다. 또 역사적으로 금은 남녀 간 사랑의 증표로 쓰이기도 한다.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 때부터 결혼식에 금반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금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는 것도 결과적으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 수 있다.
우리 역사에는 참으로 다양한 술이 등장한다. 막걸리나 청주, 소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술이 수백 종 있다. 푸른 파도가 치는 듯한 맛이라고 해서 푸를 벽(碧), 향기 향(香) 자를 쓴 벽향주, 더운 여름을 슬기롭게 이겨내자는 의미에서 여름 하(夏), 지날 과(過) 자를 쓴 과하주, 향이 무척 좋아 목으로 넘기기도 아쉽다는 뜻에서 애석할 석(惜), 넘길 탄(呑) 자를 쓴 석탄주 등이 그 예다. 다만 이렇게 멋진 이름을 지녔음에도 지금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수많은 뜻있는 사람이 옛 전통주를 재연하고 복원하고자 전통주 창업에 관심을 갖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