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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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로맨틱 가이’ 지독한 배역 몰입

  • 하재봉 영화평론가

    입력2007-08-14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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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로 ‘로맨틱 가이’ 지독한 배역 몰입
    그는 완소훈남일까. 아무리 선한 사람도 내면 어디엔가는 악한 기운이 있다는데 박용우(36)의 눈빛에서는 조금도 그런 기운을 찾을 수 없다. ‘로맨틱 가이’라는 말은 박용우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수식어다. 박용우는 외모처럼 영화에서도 따뜻한 역을 주로 맡았다. 악역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이것이 족쇄가 될 수 있다. 배우로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박용우가 맡은 역은 대부분 강인한 남성적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94년 MBC 공채 탤런트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그는 데뷔 초 첫 주연 영화 ‘올가미’(1997년)에서부터 고부 갈등을 겪는 어머니(윤소정 분)와 아내(최지우 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남자 역을 맡았다.

    박용우의 미니홈피에는 좋아하는 배우로 에드워드 노턴과 양조위의 사진이 올라 있다. 모두 박용우와 이미지가 겹치는 이들이다. 박용우는 웃는 모습이 자신과 흡사한 에드워드 노턴에 대해서 “그의 열정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양조위에 대해서는 “그의 슬픔과 고독의 카리스마는 지쳐 있는 내게 큰 힘을 준다”고 말한다. 그가 여성적이고 부드러우면서 독특한 아우라가 있는 배우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기는 내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떤 작품을 만나든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나는 오래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올가미’에 이어 박용우는 신인 배우들의 연기훈련 과정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지영 감독의 ‘까’(1998년)에서 주인공을 맡았지만, 이후 상당 기간 조연으로 만족해야 했다. ‘쉬리’(1999년) ‘동감’(2000년) ‘무사’(2001년) 등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영화에 매년 출연했지만 그의 존재감은 두드러지지 못했다. 박용우는 선이 굵은 배우는 아니다. ‘슈퍼스타 감사용’ ‘작업의 정석’에서도 그는 주인공을 빛내는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빛나는 조연에서 어느덧 주연으로

    그러나 그는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대중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어와 자신의 위치를 차지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혈의 누’(2005년)에서 가장 빛났던 사람은 수사를 맡은 차승원이 아니라 박용우였다. 그 후 그는 확실히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 8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져 당시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달콤, 살벌한 연인’(2006년)이 관객 200만명을 넘는 대박을 터뜨린 뒤 그의 주가는 계속 상승 중이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박용우는 지적인 대학강사지만 연애 한번 못해본 쑥맥 강대우 역을 맡아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줬다.

    2006년작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사실 엄정화를 위한 작품이었다. 변두리 동네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한 여성이 어린 천재 피아니스트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박용우는 엄정화의 주변인물로 등장한다. 권형진 감독은 심광호 역을 연기한 박용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매우 성실하고 똑똑하고 착한 데다 연기도 잘한다. 연기할 때는 마치 기계 같다. 한번 설정하면 매 테이크에서 정말 기계처럼 연기한다. 처음에 박용우 씨를 캐스팅했을 땐 내가 생각했던 광호가 아니었다. 그러나 박용우 씨가 연기를 잘해줘 나중에 보니 훨씬 좋은 캐릭터가 돼 있었다.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걸 잘 표현했다.”

    박용우는 올해 ‘뷰티풀 선데이’에 이어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 출연했다. 앞서 ‘뷰티풀 선데이’에서 우리는 박용우의 의외의 모습을 봤다. 강력반 베테랑 강 형사 역을 맡은 그는 대형 마약거래 현장을 급습해 마약상을 체포하지만 수거한 마약을 몰래 다른 조직에 팔아넘겨 뒷돈을 챙기는 비리의 주역이다. 하지만 강 형사가 뒷돈을 챙긴 것은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내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는 ‘뷰티풀 선데이’에서 박용우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강 형사의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했다.

    충무로 ‘로맨틱 가이’ 지독한 배역 몰입

    영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크로스 커플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서 박용우는 한채영과 격렬한 베드신을 펼친다. 촬영 당시 한채영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박용우는 “정윤수 감독은 베드신에 어느 정도 욕심을 내는 것 같고, 한채영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기자로서 작품에 출연한 만큼 서로가 좋은 작품을 위해 조절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감정에 솔직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편견을 갖지 않고 보면 여러 가지를 건질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설탕 빠진 초콜릿 느낌도 나고, 설탕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 초콜릿 느낌도 난다”고 덧붙였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지금’이다. 제목이 내포하듯 이 영화는 커플들의 이야기다. 동거가 쉬쉬할 만한 음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택 가능한 수단이 된 지금,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는 결혼한 두 커플이 등장한다. 크로스 커플, 즉 두 커플이 상대 커플의 이성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내용이다.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라 연기하는 게 어려웠다. 결혼한 상태에서 후배의 아내와 정사를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나 같으면 이러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리어 민재 역을 맡은 박용우는 백화점 VIP룸의 패션 컨설턴트 유나(엄정화 분)와 부부로 나온다. 연애 4년, 결혼 3년차다. 민재는 부드럽고 유머러스하다. 유나는 화려하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고생하며 자란 인물로 톡톡 튀는 성격을 가졌다. 이들과 대비되는 커플이 재벌급 건설회사의 이사 영준(이동건 분)과 조명 디자이너 소여(한채영 분)다. 식사도 회사 책상에서 할 만큼 워커홀릭인 영준은 이성적이며 무뚝뚝하다. 소여는 여성적이고 섬세하다.

    차기 작품엔 전혀 다른 캐릭터 연기 꿈꿔

    홍콩 출장에서 만난 민재와 소여. 소여는 민재의 다정다감함과 배려심에 끌린다. 민재 역시 유나와 달리 섬세하고 여성적인 소여에게 이끌린다. 결국 이들은 낯선 공간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부부가 다른 커플의 파트너와 함께 있는 신이 훨씬 많기 때문에 박용우의 실제 파트너는 한채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동건-엄정화 커플이 거칠고 노골적인 유혹의 대사로 밀어붙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감추고 멈칫한다면, 박용우-한채영은 은근하고 부드럽게 시작했지만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나간다. 결혼한 한채영의 베드신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생각만큼 노골적이지는 않다. 한채영의 미숙하고 건조한 연기를 박용우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연기가 감싸안고, 이동건의 경직된 모습을 엄정화의 ‘끼’가 받쳐줘 조화로운 커플 연기가 펼쳐진다.

    “사랑과 결혼이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 과연 동일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영화다.”

    박용우는 아직 차기작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사랑에 관한 영화는 아닐 것”이라고 했다. 다른 스타일의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뜻이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 때문에 어디서나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는 그는 “부모님은 올해를 데드라인으로 정해놓았지만 이왕 늦은 거 천천히 하겠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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