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에 자리한 서울지방법원 전경.
형사23부가 사용하는 서울지법 309호실은 최근 수많은 증인과 변호인, 방청객들로 북적거린다. 재판장인 김병운 부장판사(사시 22회)는 공판검사와 변호인의 날카로운 법리 논쟁뿐 아니라 다음 공판 일정을 조정하는 일에도 적잖은 시간이 들 정도다. 또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기록 검토를 위해 배석판사인 박종국(사시 39회) 이주영(사시 39회) 판사까지 밤을 새는 일이 잦아졌다. 과연 형사23부는 어떤 사건을 맡고 있기에 밤을 밝히는 걸까.
설 연휴 직전 단 한 주 동안 법정에 출두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안희정, 이광재, 강금원, 최도술, 손영래, 문병욱, 김성래, 서정우, 이재현씨 등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에서부터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모금을 주도한 인사들까지 모두 309호실로 출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이듬해 사형이 집행된 8명의 명예회복 재심 소송, 최근 경찰청이 집중 수사한 군납비리와 서울지검이 기소한 태권도협회 비리, 두산중공업 뇌물비리, 한국IBM 납품비리 사건에 이르기까지 무려 70여건의 사건을 형사23부가 맡고 있다.
각종 대형사건 70여건 총집결
‘부패전담재판부’로 선정된 형사합의23부 판사실.
언뜻 사건의 양이 문제가 될 듯 보이지만 민감한 사건인 만큼 사건 외적인 요소가 재판부를 더욱 힘겹게 한다는 게 법조계 주변의 얘기다.
서울지법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옛 담임선생님이 재판장에 끌려나온 격인 서정우 피고인(변호사) 건이 가장 민감할 것”이며 “불법 대선자금 사건의 백미는 서피고인 1심 판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잘 알려진 대로 사법시험 6회인 서피고인은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판사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 그는 1980년대 ‘사법연수원 교수-서울지법 민사부장-서울고법 민사부장’을 지내면서 민사 판사들의 대선배로서 존경을 받아왔다. 10년간의 변호사 활동기간 중 패소율 0%를 기록한 데도 그의 화려한 재조경력이 배경으로 작용됐다. 현재 서울지법 형사부 소속 대다수 부장판사들은 과거 민사판사 시절 서피고인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를 빗대어 법조계에서 ‘담임 선생님론’이 불거진 것.
서정우 변호사,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손영래 전 국세청장(왼쪽부터 시계방향)
형사23부는 또 노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광재, 안희정씨가 관계돼 있는 썬앤문 감세청탁 사건과 생수회사 장수천 사건도 맡고 있다. 지난해 4월 계몽사 농협 115억원 불법대출 사건 재판을 맡았던 형사23부는 이후 썬앤문 그룹 동업자인 문병욱 회장과 김성래 전 부회장 사이의 공방을 지켜봐왔다. 이 공방은 국세청 감세청탁 사건을 거쳐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으로 번지면서 형사23부가 담당한 주요 사건으로 떠올랐다.
이같이 주요 사건이 형사23부에 몰리자 이에 맞춰 최고의 변호사를 잡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는 전언이다. 특히 형사23부와 친분 있는 변호사를 잡기 위한 경쟁이 뜨거웠는데, 실제로 사건 담당 변호사 대부분이 서울지법 판사 출신 변호사들로 채워졌다. 해프닝도 없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사법개혁 논쟁이 일었을 때 시민후보 대법관으로까지 추대된 박시환 변호사(사시 21회)가 썬앤문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김성래씨 변호인으로 선임된 것. 법원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박변호사가 2주 만에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선임계를 포기함으로써 파문이 일단락되기도 했다.
최근 법조계에서는 검찰 혁신의 중추역을 맡았던 대검 중수부와 같이 서울지법 형사23부가 비슷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 입김과 경제 불안이라는 우려를 잠재우고 성공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검찰의 수사 성과를 훼손하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여졌다. 과연 형사23부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얼마나 공정하게 재판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