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이런 주제들을 다룰 때 가장 적당한 소재는 ‘유령’이다. 노엘 카워드의 오리지널 희곡을 영화화한 데이비드 린의 영화 ‘유쾌한 유령’에서는 이제 막 새로운 여자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려는 남자에게 죽은 전처의 유령이 나타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감독 앤터니 밍겔라의 초기작 ‘유령과의 사랑’에서는 반대로 죽은 남편이 아직도 남편을 잊지 못하는 아내에게 나타난다. 이런 유령 코미디 속에서 유령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감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연인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에릭 시걸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러브 스토리’를 기억하는가? 이 작품의 속편이 ‘올리버 스토리’이고, 이 작품 역시 영화화됐다는 사실을 아는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전편에서 주인공 제니의 죽음으로 스토리가 끝나길 바란다. 아무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인생의 수순이라고 해도 다른 사랑이 끼어드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속편 ‘올리버 스토리’는 흥행에 참패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죽은 사람의 이미지를 보고, 그 죽은 사람 대신 산 사람을 상대하는 스토리의 영화가 한 편 있다. 이는 유령 이야기보다 변태적이고 위험하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이 바로 그 영화다. 주인공 형사 스코티는 자신이 구하지 못한 자살자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길거리에서 만난 뒤 그 여자를 죽은 여자처럼 변장시킨다. 영화의 결말은 당연히 참혹하며, 스코티의 행동은 그만큼이나 변태적이다. 죽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시체음란증에서 기껏해야 한 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자식을 남기고 죽었다면 근친상간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우는 단편소설에서 이 모든 재료들을 다루었다. ‘모렐라’ ‘라이지아’ ‘베레니스’… 끝도 없다.
김대승 감독의 신작 ‘가을로’는 죽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유지태는 삼풍백화점 붕괴로 죽은 연인 김지수에 얽힌 기억을 따라 여행을 떠나는데, 거기서 엄지원과 자꾸 길이 엇갈린다. 김대승 감독이 2000년에 제작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와 설정 및 대사가 은근히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