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이미 쇠잔한 왕조일지라도 일제강점기 황실의 재산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당시 황실의 재산을 관리한 기관은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곳. 일제강점기 말까지 이왕직이 관장한 황실 재산 중 임야, 대지, 전답의 총면적만 해도 1억5519만8532평에 달했다[월간 ‘신동아’는 1968년 8월호에서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이왕가세습재산유서조(李王家世襲財産由緖調)’ 등 기타 마이크로필름을 근거로 이같이 보도했다].
1960년 의문의 화재로 재산목록조차 없어
그러나 이 같은 황실 재산은 광복 후 공중분해되어 사라졌다. 재산목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추적 또한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는 1960년 발생한 의문의 화재사건 탓이 크다. 당시의 신문 보도를 보자.
6일 새벽 창경궁 내에 있는 구황실재산관리총국 안에 벼란간 불이 일어나 청사(목조 2층·80평)와 중요 서류, 집기 등을 전소하고 아침 5시 10분경 진화되었는데 △방화 △누전 △숯불의 세 각도에서 화재 원인을 수사 중에 있는 경찰은 6일 정오 현재 방화에 가장 유력한 수사 관측을 내리고 있어 앞으로의 수사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을 전소… 농후한 방화 혐의’)
구황실재산관리총국(혹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하 총국)은 광복 후 황실 재산의 관리를 도맡아온 기관이다. 이왕직으로부터 관련 서류를 모두 이관받아 보관하고 있던 이곳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니, 황실 재산의 마지막 증거마저 화염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이 화재가 방화로 의심받은 까닭은 당시에 총국 직원들의 재산 부정 유출에 대한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황실 재산은 1954년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됨에 따라 모두 국유로 편입됐다. 이는 영친왕을 정치적 라이벌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이 황실의 ‘힘’을 빼버릴 목적으로 취한 여러 조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가 소유가 된 황실 재산의 상당 부분은 알게 모르게 처분돼갔다. 이에 1960년 새로 총국장으로 임명된 오재경 대한여행사 이사장은 당시 문교부 국장으로 있던 이창석 씨를 초빙해 황실 재산 상태를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창석 국장은 곧 어려움에 직면한다. 관련 서류가 부실해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의 서류는 더욱 불충분했다. 간신히 재산목록을 만들어 정리에 착수하려고 할 즈음에 화재가 발생하고 만 것. 이 국장은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구황실 사무처에 가보니, 신빙 서류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누가 무엇을 어떻게 속여서 해먹었는지 알 수 없어서 놀랐습니다. 그나마 조사를 해서 대강이나마 증거서류를 만들어놓으니까 화재가 나서 다 타버렸으니, 그것은 분명히 방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영친왕’, 김을한 지음)
창경궁 명정전. 몇 남아 있지 않은 황실 재산 중 하나다.
그러나 윤 전 국장은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항변한다. 윤 전 국장은 1968년 월간 ‘신동아’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1958년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배재대학에서 땅을 불하해달라고 하니 현장을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대통령의 모교를 위해 조선 황실의 죽은 왕자도 자리를 옮겨야 했다. 배재대학에 불하된 땅에는 왕자묘(王子墓)와 귀인묘(貴人墓)가 있었는데, 대학 건물 착공을 위해 경기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 땅은 반환 소송으로까지 이어진 최초이자 최후의 황실 재산이다. 그러나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황실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 실패하고 만다. 1964년 대법원은 이 토지의 불하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구황실 재산을 민간에 불하할 때는 구황실 재산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 경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조선 황실에 대해 연구해온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그러나 심의를 거치지 않고 불하된 황실 재산이 2000여 건에 달했기 때문에 천문학적 액수의 소송이 줄줄이 이어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 대통령은 배재대학 땅 문제를 정치적으로 무마해버렸다”고 말했다.
빼돌려진 황실 재산은 ‘투기’에도 활용된 듯하다. 1964년 4월30일 ‘동아일보’는 ‘구황실재산 14만 평 무연고자에 불하 … 주민들 진정으로 수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경기 양주군 구리면 매갈리와 사노리의 황실 재산인 동구릉 임야를 농림부가 연고가 없는 삼중건설(대표 신규식)에 개간 사업을 이유로 불하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중건설은 유령회사였다. 이 회사는 평당 5원에 불하받은 이 땅을 제삼자에게 평당 35원씩 받고 5만 평을 팔아치웠다. 나머지 9만 평은 불하 당시 ‘공작비’ 조달을 맡은 한 개인에게 법적 수속 없이 분배했다고 한다.
“재산 복원 과정 자체가 역사 바로 세우기”
이런 식으로 해서 황실 재산은 야금야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1963년 문화재 보호 재원 확보를 목적으로 황실 재산의 처분이 단행되기 시작했을 무렵, 황실 토지재산의 총면적은 1억141만여 평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1억5519만여 평이었으니 광복 후 18년 동안 5378만여 평이 처분된 셈이다. ‘신동아’(1968년 8월호)는 “자유당 시절의 재산 처분 경유를 짐작컨대 대개 규모가 큰 것은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고, 작은 것은 사무총국 단독으로 처분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썼다.
63년 이래 영구보존재산 행정재산을 제외한 잡종재산의 처분량은 2817만1107평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구황실 소유의 토지재산은 총 7364만4000평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문제 되는 것은 건국 이후 60년경까지 자유당 치하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처분했다고 볼 수 있는 5378평 중에는 서울 시내 도처에 산재해 있던 구황실 재산의 노란 자위라 할 수 있는 대지 1만399평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원남동, 와룡동, 정동, 명동, 원서동, 안국동, 청파동, 회현동, 제기동, 종암동, 휘경동, 성북동 등지에는 영구보존재산인 각 궁궐과 행정재산 이외에도 상당한 황실 소유의 대지가 있었다. 이 중 1만399평이 광복 후부터 4·19까지의 기간에 행방불명됐다. (‘구황실재산’, ‘신동아’ 1968년 8월호)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토지재산 7000여 평마저도 1989년 관리 주체가 문화재청에서 재정경제부로 넘어가면서 거의 처분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고도보존과 관계자는 “현재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황실 재산은 서울에 있는 5개 궁과 전국 13개 능밖에 없다”면서 “재경부로 이관된 7000여 평의 잡종재산은 민간에 매각되는 등 모두 처분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광복 후에 권력자와 모리배들에게 털려먹은 황실 재산은 몰락한 황실과 닮은꼴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이정재 사무총장은 “황실 재산은 이미 국고로 다 넘어갔기 때문에 되찾아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황실사랑회의 전종현 위원장은 “황족 개인에게 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황실 재산을 복원해내는 과정 자체가 역사 바로 세우기이기 때문에 숨겨진 황실 재산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