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9월14일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부시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북한 핵실험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측 대북정책의 성격부터 살펴봐야 한다. 한국은 2002년 10월 2차 핵 위기가 발생한 이래 북한과 미국 간의 중재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미국 측에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수단만이 북핵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안이라는 점을 설득했고, 북한 측에는 그들을 회담에 나오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때론 미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 당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신호를 일관되게 보냈다.
노무현 정부의 집요한 노력은 2005년 9월19일 베이징 제4차 6자회담에서 비로소 성과를 드러냈다. 한국 대표단이 북한과 미국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북한은 핵 포기에 합의하고 미국은 CVID(완벽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파괴)라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나 ‘포기(abandon)’라는 한결 완화된 단어를 수용했다. 북-미 양측은 결국 패자 없는, 마치 모두가 승자처럼 보이는 불완전한 봉합에 합의했다.
한국의 중재 실패, 北을 더 극단적으로 몰아가
한국을 들뜨게 했던 또 하나의 개가는 ‘평화체제’에 대한 가능성을 합의문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이는 민족공조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비전과 의지를 가장 잘 반영하는 표현으로, 참여정부가 본격적인 차원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은 합의문 발표 즉시 “경수로가 추가 공급되기 전까지는 합의 사항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실수를 범했다. 대북 피로증후군에 장기간 시달려온 미국 조야 역시 북한의 합의 이행 의지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에 대한 동결조치를 취하면서 북한의 위폐 제작 및 불법자금 세탁 등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9·19 합의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사문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미 양측의 대북 전략 핵심 실세로 꼽히는 이종석 통일부 장관(왼쪽)과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미국은 왜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강화한 것일까? 미국은 북한이 대략 네 가지 전략에 의존해왔다고 판단했다. 첫째, 양보를 끊임없이 끌어내고 둘째, 해결 과정을 지연시키며 셋째, 새로운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넷째, 약속을 회피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첫째, 북한을 계속 설득하고 둘째, 주변국들과 공동전선을 펴며 셋째, 게임의 방식을 새롭게 짜는 것이었다.
이 중 첫째와 둘째 방식은 한국과 중국 정부의 협조가 없는 한 성공하기 어렵다. 셋째 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은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 등 유럽에서 ‘헬싱키 프로세스’를 추진했던 인사들을 대북(對北) 라인에 배치함으로써 인권문제와 경제협력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게임의 룰’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세 방식은 모두 실패했다. 대안 부재 속에서 나온 미국의 선택은 북한의 고통을 가중시켜 회담장에 나오는 시간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로버트 조지프 국무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가 ‘맞춤형 제재’를 진두지휘했고, 결국 미국의 금융제재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래 최대 성과를 본 사례로 인정받게 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이 기댈 상대는 한국과 중국뿐이었다. 양국의 주선으로 어렵게 얻은 기회에서 북한은 금융제재를 풀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했고, 여러 경로를 통해 위폐 제조 주범을 처벌하는 수준에서 사건을 봉합할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금융제재는 6자회담과 무관한 일임을 주장하면서 북한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참여정부의 노력은 미국과 북한 모두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한국의 중재노력 실패는 북한을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다. 기왕에 북한은 참여정부와의 교류를 통해 많은 학습효과를 얻고 있었다. 북한은 참여정부가 대북 협상력 제고를 위해 비료와 식량, 심지어 현금까지 제공하려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북한은 또 이를 독려함으로써 한-미 동맹을 이완시키는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반면에 참여정부의 대미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는 패러독스도 이해하고 있다.
본질은 뒷전, 美-日 과민반응에 더 신경 쓴 한국
무엇보다 북한은 참여정부가 민족공조라는 대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즉 북한이 미국에 대해 강경책을 쓰더라도, 한국은 값비싼 투자를 통해 얻은 교두보를 결코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결국 북한은 7월4일 미사일 발사를 단행했다. 이는 미국에 북-미 양자회담을 선택하라는 요구인 동시에, 북핵 이외에 미사일이라는 또 다른 의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북한은 대포동과 여타 미사일을 함께 발사함으로써 대포동 실패의 효과를 최소화하고,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미사일 사정권 내에 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북한이 예상한 대로 한국, 일본, 미국은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 에서 크게 차이를 보였다. 일본이 미국과 함께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을 모색하는 동안 참여정부는 사건의 본질인 북한의 미사일 위협보다는 미국과 일본의 과민반응에 더 신경 쓰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한국을 일본과 미국의 영향권에서 분리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인 효과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도 손실은 적지 않았다. 중국이 러시아와 함께 유엔안보리 결의안에 동참했으며,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보통국가로의 전환을 가속할 명분을 축적했다.
이 와중에도 한국은 북-미 간 중재에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다. 참여정부는 북한을 6자회담의 틀로 인도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 ‘포괄적 접근(common and broad approach)’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생각처럼 쉬워 보이지 않았다.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미국의 금융제재 완화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하지만, 미국 입장으로는 북한의 6자회담으로의 단순한 복귀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직전 핀란드에서 북한 미사일은 위협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미사일을 발사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의도를 주목해야 한다고 발언함으로써 북한의 회담 복귀를 기대하는 외교적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했다. 결론적으로 참여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이유에서라도 한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고 우선순위 (sequencing)의 문제, 즉 미국의 선(先)핵포기 주장과 북한의 동시타결 원칙 간의 격차가 결코 좁혀지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이 유엔안보리 결의안 1695를 통해 압박의 수위를 높이던 10월3일, 북한은 핵실험 가능성을 공개하면서 다시 위협의 수준을 높였고 결국 10월9일 핵실험을 단행했다. 일본의 아베 신임총리가 중국을 첫 방문한 후 서울을 방문하는 순간을 택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예상보다 조기에 실험을 실시했던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 이후에도 참여정부는 ‘정직한 중재자 역할’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 핵실험은 어쩌면 참여정부 외교팀이 집단 최면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에게는 낭비할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을 기다리면서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사업 등을 완전히 단절하기보다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참여정부의 속내인 것 같다.
참여정부 외교팀 집단 최면상태서 깨어나야
그러나 한국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다면 소원해진 주변국들과의 협력관계를 복원시키는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도 인명 피해와 참전 비용을 줄이고 국내 정치적 반대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합리적 판단의 기초가 됐다. 다만 히틀러가 그의 선의를 악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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