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 원래 조선 초기 문신 이계전 묘터였다

명당이면 묘지 재활용한 조선왕조 대표 사례

  • 안영배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풍수학 박사)

    입력2026-02-27 0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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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이 영면한 경기 여주시 영릉. ‘왕릉 중 제일’로 평가되는 풍수 명당이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세종대왕이 영면한 경기 여주시 영릉. ‘왕릉 중 제일’로 평가되는 풍수 명당이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경기 여주시 능서면에 위치한 영릉(英陵·사적 제195호)은 세종대왕(1397~1450)과 소헌왕후가 영면한 곳이다.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영릉을 ‘왕릉 중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세종대왕을 이곳에 모신 뒤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워낙 빼어난 명당이라 현대 풍수인들도 이곳을 필수 답사 코스로 여긴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처음부터 이곳에 묻힌 것은 아니다. 원래 세종대왕릉은 태종 묘인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 언덕에 있었다. 세종대왕은 생전에 “부모님 곁이 가장 명당”이라면서 부모 묘 근처에 묻히기를 원했고, 4년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과 함께 헌릉 근처에 합장됐다. 

    그런데 이후 왕실에 잇달아 변고가 발생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1414∼1452)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1441∼1457)마저 숙부인 수양대군(1417∼1468)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재위 내내 피부병에 시달렸다. 게다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1438~1457) 또한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8세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1469년 즉위한 바로 그해에 세종대왕릉을 이장하기에 이른다. 할아버지인 세종 사후 왕실에 잇달아 변고가 발생한 것이 묘와 관련 있다는 지관들의 의견을 수용한 결과다.

    여주 영릉 터는 당대 최고 지관들이 경기 지역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찾아낸 대명당으로 전해진다. 영릉에 들어서면 좌우에 빼곡히 들어선 소나무가 능 쪽으로 기울어진 채 자라고 있는데, 마치 대전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조선 왕릉을 조사 연구하는 박정해 한양대 교수(융합산업대학원 동양문화학과)에 따르면 이 터의 원래 주인은 조선 초기 문신 이계전(1404~1459)이었다. 한산이씨인 이계전의 증조부는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이곡이고, 조부는 ‘고려 3은’ 중 한 명인 목은 이색이다. 조선 왕가도 함부로 대하지 않은 고려 명문거족 출신인 셈이다. 

    이 가문은 고려 성리학계를 이끌 만큼 학업이 깊을 뿐 아니라, 풍수에도 매우 해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계전의 부친 이종선이 충남 서천에 모신 이색 묘는 신령한 기린이 내려와 풀을 뜯어 먹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으로 전해진다. 이계전의 묘 또한 지관들이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기세가 빼어난 터였다.  

    한편 영릉 터는 세조 시대에 우의정을 지낸 광주이씨 이인손(1395~1463)과도 관련 있다. 이계전의 묘가 왕릉으로 정해지면서 이계전 묘와 더불어 인근에 있던 이인손의 묘도 옮기게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이인손의 묘를 파 유해를 들어내니 그 아래 “이 자리의 주인이 나타나면 여기서 연을 날려라. 연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곳으로 묘를 옮겨라”라고 적힌 판석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인손 후손들이 연을 날리자 서쪽 약 10리 밖에 떨어졌고, 그곳을 이인손의 새로운 묘택(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신지리)으로 삼았다고 한다. 

    경기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희빈 장씨의 묘. 궁능유적본부 제공 

    경기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희빈 장씨의 묘. 궁능유적본부 제공 

    길지에 묻힌 희빈 장씨

    숙종의 후궁이던 희빈 장씨(장옥정·1659~1701) 또한 묘가 여러 번 옮겨진 인물이다. 그의 굴곡진 삶은 TV 드라마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오늘날에도 그는 궁중 암투의 주역이자 악독한 여성 이미지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드라마 속 묘사와 역사적 사실은 다를 수 있다. 

    희빈 장씨는 당쟁이 치열하던 17세기 후반에 살았다. 당시 그는 남인의 지원을 받아 후궁이 됐고, 숙종의 후계자(경종)를 낳아 국모 지위까지 올랐으나 노론의 견제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뒤 끝내 사약을 받았다. 희빈 장씨를 견제하던 노론 측에서 기록한 그의 모습은 천인공노할 만하다. ‘수문록’ 등 야사에는 그가 죽기 직전 세자의 고환을 뜯어 고자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소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천벌을 받아 죽자마자 온몸이 썩어 들어간 탓에 시신을 궁 밖으로 버렸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희빈 장씨 사망 후 그에 대한 예우는 남달랐다. 숙종은 그가 세상을 떠난 1701년 10월 10일 아들인 세자 부부에게 상주로서 거애(擧哀) 행사에 참여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라고 명한다. 또 숙종은 세자로 하여금 어머니 장씨를 위해 3년간 상복을 입게 했다. 파격적인 조치였다.

    희빈 장씨의 무덤을 쓰는 방식도 여느 후궁들과 달랐다. 후궁 묘는 친정 식구나 궁궐 환관이 구하는 게 상례인데, 숙종은 왕실 종친(금천군 이지)과 예조참판에게 명을 내려 지관을 거느리고 명당을 구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경기 양주군 인장리(현재 구리시 인창동 궁말 근처로 추정)에 희빈 장씨의 묘가 조성됐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719년 희빈 장씨의 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지관 함일해가 1717년 희빈 장씨 묘가 불길하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 숙종은 세자 앞날을 위해 희빈 장씨가 길지(吉地)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또다시 전국 유명 지관을 동원해 1년간 물색한 끝에 경기 광주군 진해촌에서 좋은 터를 찾아냈다. 지금의 경기 광주시 오포1동 일대다. 그런데 현재 희빈 장씨의 묘는 이곳에도 있지 않다. 1969년 6월 도시계획을 이유로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으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서오릉은 숙종이 묻혀 있는 곳이다. 

    이와 관련해 박정해 교수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왔다. 희빈 장씨의 옛 묘가 현재 다른 사람의 묘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옛 왕족 무덤을 재사용하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박 교수에 따르면 현재 이 묘의 주인은 한국 굴지 제약회사인 국제약품 창업주 남상옥 회장이다. 1984년 작고한 그는 1959년 국제약품 설립 후 타워호텔을 인수하는 등 경제인으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희빈 장씨의 묘가 서오릉으로 옮겨가자 이 터를 구입한 후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당 묘지는 재활용할 수 있어”

    묘지 풍수 이론에서는 조상의 유해가 길지에 있을 경우 후손들 또한 그 기운을 누린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남 회장 후손들은 기업 경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재력도 막강하다는 얘기가 업계에서 들려온다. 

    앞의 두 사례는 현대인의 묘지 문화에도 참고할 점이 있다. 과거에는 묘지로 한 번 쓰였던 파묘(破墓) 터는 처음 묘를 쓰는 생토(生土) 터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다. 영화 ‘파묘’ 내용처럼 후손들이 여러 흉사를 겪다가 풍수적 이유를 들어 파묘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 산재한 공원묘지에서 파묘 터는 정상가보다 할인되는 관례가 생겼을 정도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한 번 쓴 묘라고 해서 꺼리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권력이 강한 가문이 등장할 경우 그 기운을 꺾고자 해당 집안의 명당터를 일부러 빼앗아 왕실 소유로 돌리기도 했다. 영릉과 희빈 장씨의 묘 사례는 파묘 터라 할지라도 풍수적으로 길지라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침 서울에서 조선 왕릉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조선의 황금기를 수놓은 천(天)·지(地)·인(人)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숙종, 영조, 정조 시대 왕릉 및 역학을 다루는 토론회가 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성동구 한양대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를 이끄는 박정해 교수는 “왕실 풍수 및 명리 분석 사례가 현대인의 묘지 재활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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