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앞에는 새롭고 더욱 힘겨운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10년 전 우리의 과제가 IRA(아일랜드 독립 반군)나 의료보험이었다면, 지금은 우리 눈앞에 지구온난화나 국제 테러리스트 같은 더욱 힘겨운 과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두를 영국의 힘으로 이겨나가야 합니다.”
토니 블레어의 확신에 찬 한마디 한마디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홀을 가득 메운 노동당원들은 넋을 잃은 채 노동당 당수이자 영국 총리인 토니 블레어의 연설을 경청했다.
“노동당 당수로서의 지난 12년은 참으로 영광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더 이상 노동당을 이끌고 전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저와 노동당이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폭풍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고, 몇몇 당원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블레어 역시 감정이 격해진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정을 찾은 뒤, 연단에 앉아 있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을 가리켰다.
“노동당이 거둔 세 번의 총선 승리는 고든 브라운 장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업적이었습니다. 뛰어난 동지, 국가의 충실한 종복, 브라운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뛰어난 연설·대중 친화력 ‘최대 무기’
브라운은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3년간의 동지이자 애증에 찬 이들의 관계, 그리고 지난 몇 달간 계속됐던 노동당의 내분은 이 한마디로 봉합되는 듯했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출신으로는 역대 최장수 총리로 현재 재임 9년을 넘어선 그는 누가 뭐래도 뛰어난 정치인이자 성공적인 총리다. 1953년 5월생으로 이제 겨우 50대 중반의 나이. 9년이나 영국을 다스렸음에도 여전히 젊고 생기 넘치는 블레어는 9월26일 맨체스터에서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총리이자 노동당 당수로서 연단에 섰다. 대중 연설의 대가인 그답게 이번 연설 역시 수차례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영국의 언론들은 “정치 연설의 마스터클래스를 보는 듯했다”며 블레어 총리의 연설을 극찬했다. 그에 비해 하루 앞선 25일에 진행된 브라운 재무장관의 연설은 예상대로 ‘신실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총릿감이라는 인상은 주지 못했다’는 미지근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
토니 블레어의 영광은 말 그대로 ‘찬란한 낙조(落照)’다. 블레어는 9월 초, “1년 안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며 폭탄 선언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1년 안에 물러나겠다’고만 했지 정확하게 언제 물러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언론들은 1997년 총선 승리로부터 꼭 10주년이 되는 2007년 5월에 블레어 총리가 당수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94년 41세의 젊은 나이로 노동당 당수에 오른 이후 블레어의 정치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아니, 블레어는 승리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행운의 사나이다. 53년 스코틀랜드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에든버러의 명문 사립중·고교인 페테스스쿨과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는 믹 재거 같은 록가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로는 아버지처럼 변호사로 일했다. 75년 노동당에 입당했고, 83년 세지필드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 약관 30세에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블레어의 최대 장점은 뛰어난 연설 실력 및 대중과의 친화력이다. 이를 무기로 노동당 내에서 신망을 얻은 블레어는 1992년 존 스미스 노동당 당수가 조직한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영국 야당이 정권 획득에 앞서 조직해놓는 내각)의 내무장관이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처→메이저 총리로 이어지는 보수당이 굳건히 정권을 잡고 있었고, 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는 영국 국민들에게 별다른 신망을 얻지 못했다.
1994년 노동당 당수 존 스미스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당원들은 차기 당수로 젊고 유망한 블레어를 지지했다. 이때 블레어가 자신과 당수 경쟁을 벌이던 브라운에게 “총리가 되고 나면 당수 자리를 이양할 것”을 밀약한 사실은 유명하다. 41세의 나이로 역사상 최연소 노동당 당수가 된 블레어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의 길’을 내세우며 97년 총선에서 압승, 43세의 나이로 총리가 된다.
41세에 노동당 당수, 43세에 총리
총리가 된 후 블레어는 영국을 이끌어가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자치권을 이양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상원의 세습귀족제를 종식시켰으며, IRA와 ‘굿 프라이데이’ 협정을 이끌어내 아일랜드 무장투쟁 세력을 해체했다. 또 전통적으로 영국의 취약점이던 교육과 보건 정책에 420억 파운드(약 74조74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대학생들에게 연 3000파운드의 등록금을 부과해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세 명의 자녀를 둔 블레어-셰리 부부는 2000년 결혼 20년 만에 넷째 레오를 낳았다. 블레어는 150년 만에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에서 아이를 낳은 총리가 되기도 했다.
2001년 블레어는 또다시 총선에서 기록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노동당은 승승장구했고, 보수당 당수인 윌리엄 헤이그는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블레어는 여전히 40대였고, 젊고 유능한 총리를 대신할 인물은 없어 보였다. ‘총리가 된 후 정권 이양’ 밀약만 믿고 있던 브라운으로서는 속절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를 쓰러뜨린 일격은 뜻밖에도 외부에서 날아왔다. 그가 총선에 승리하자마자 미국에서 9·11 테러가 터진 것이다. 블레어는 미국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에 연이어 뛰어들었다. 영국 육군 병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4만6000명을 이라크전에 파병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유럽 각국, 특히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그런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후임 새 당수엔 23년 지기 브라운 유력
그러나 블레어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보유 여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블레어를 ‘부시의 푸들’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노동당 내각에서도 이라크전 참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줄을 이었다.
2006년 상반기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들의 블레어에 대한 지지도는 26%에 불과했다. 이는 역대 노동당 총리 중 최악의 지지도다. 설상가상으로 8월 러시아에서 열린 G8 회담 때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른 부시가 블레어에게 면박을 주는 대화가 그대로 공개되면서 영국인들은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결국 9월 블레어가 “1년 안에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노동당은 새 당수와 함께 2007년 10월의 총선에 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블레어를 이을 새 당수는 누구일까?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10년을 기다려온 브라운 재무장관을 꼽는다. 23년간 동지적 관계를 이어온 블레어-브라운의 관계는 최근 들어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브라운 역시 지난 여름부터 “블레어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왔다”며 총리 사임을 촉구했다.
문제는 브라운이 블레어의 뒤를 이어 노동당의 승리를 이끌 만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과묵하고 신중한 브라운은 블레어처럼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연설가가 결코 아니다.
영국인들은 대체로 브라운 장관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가 이튼 출신의 젊은 보수당 당수 제임스 캐머런의 신선한 이미지와 경쟁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사태에 대해 블레어와 브라운 양쪽은 물론이고 두 사람과 절친한 관계인 또 한 사람의 핵심인물 피터 만델슨 EU무역부 장관 역시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만델슨은 다만 “노동당이 미치광이 같은 내분에서 이제 그만 벗어났으면 한다”며 “블레어와 브라운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 자신이 아닌, 국가의 안위를 위한 결단을 내릴 것이다”라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
토니 블레어의 확신에 찬 한마디 한마디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홀을 가득 메운 노동당원들은 넋을 잃은 채 노동당 당수이자 영국 총리인 토니 블레어의 연설을 경청했다.
“노동당 당수로서의 지난 12년은 참으로 영광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더 이상 노동당을 이끌고 전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저와 노동당이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폭풍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고, 몇몇 당원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블레어 역시 감정이 격해진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정을 찾은 뒤, 연단에 앉아 있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을 가리켰다.
“노동당이 거둔 세 번의 총선 승리는 고든 브라운 장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업적이었습니다. 뛰어난 동지, 국가의 충실한 종복, 브라운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뛰어난 연설·대중 친화력 ‘최대 무기’
브라운은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3년간의 동지이자 애증에 찬 이들의 관계, 그리고 지난 몇 달간 계속됐던 노동당의 내분은 이 한마디로 봉합되는 듯했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출신으로는 역대 최장수 총리로 현재 재임 9년을 넘어선 그는 누가 뭐래도 뛰어난 정치인이자 성공적인 총리다. 1953년 5월생으로 이제 겨우 50대 중반의 나이. 9년이나 영국을 다스렸음에도 여전히 젊고 생기 넘치는 블레어는 9월26일 맨체스터에서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총리이자 노동당 당수로서 연단에 섰다. 대중 연설의 대가인 그답게 이번 연설 역시 수차례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영국의 언론들은 “정치 연설의 마스터클래스를 보는 듯했다”며 블레어 총리의 연설을 극찬했다. 그에 비해 하루 앞선 25일에 진행된 브라운 재무장관의 연설은 예상대로 ‘신실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총릿감이라는 인상은 주지 못했다’는 미지근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
토니 블레어의 영광은 말 그대로 ‘찬란한 낙조(落照)’다. 블레어는 9월 초, “1년 안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며 폭탄 선언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1년 안에 물러나겠다’고만 했지 정확하게 언제 물러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언론들은 1997년 총선 승리로부터 꼭 10주년이 되는 2007년 5월에 블레어 총리가 당수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94년 41세의 젊은 나이로 노동당 당수에 오른 이후 블레어의 정치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아니, 블레어는 승리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행운의 사나이다. 53년 스코틀랜드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에든버러의 명문 사립중·고교인 페테스스쿨과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는 믹 재거 같은 록가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로는 아버지처럼 변호사로 일했다. 75년 노동당에 입당했고, 83년 세지필드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 약관 30세에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블레어의 최대 장점은 뛰어난 연설 실력 및 대중과의 친화력이다. 이를 무기로 노동당 내에서 신망을 얻은 블레어는 1992년 존 스미스 노동당 당수가 조직한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영국 야당이 정권 획득에 앞서 조직해놓는 내각)의 내무장관이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처→메이저 총리로 이어지는 보수당이 굳건히 정권을 잡고 있었고, 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는 영국 국민들에게 별다른 신망을 얻지 못했다.
2000년 8월 프랑스 남서부의 생 마르탱 드와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블레어 총리가 아들 레오를 안고 부인 셰리 여사와 산책하고 있다.
41세에 노동당 당수, 43세에 총리
총리가 된 후 블레어는 영국을 이끌어가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자치권을 이양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상원의 세습귀족제를 종식시켰으며, IRA와 ‘굿 프라이데이’ 협정을 이끌어내 아일랜드 무장투쟁 세력을 해체했다. 또 전통적으로 영국의 취약점이던 교육과 보건 정책에 420억 파운드(약 74조74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대학생들에게 연 3000파운드의 등록금을 부과해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세 명의 자녀를 둔 블레어-셰리 부부는 2000년 결혼 20년 만에 넷째 레오를 낳았다. 블레어는 150년 만에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에서 아이를 낳은 총리가 되기도 했다.
2001년 블레어는 또다시 총선에서 기록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노동당은 승승장구했고, 보수당 당수인 윌리엄 헤이그는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블레어는 여전히 40대였고, 젊고 유능한 총리를 대신할 인물은 없어 보였다. ‘총리가 된 후 정권 이양’ 밀약만 믿고 있던 브라운으로서는 속절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를 쓰러뜨린 일격은 뜻밖에도 외부에서 날아왔다. 그가 총선에 승리하자마자 미국에서 9·11 테러가 터진 것이다. 블레어는 미국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에 연이어 뛰어들었다. 영국 육군 병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4만6000명을 이라크전에 파병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유럽 각국, 특히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그런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후임 새 당수엔 23년 지기 브라운 유력
그러나 블레어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보유 여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블레어를 ‘부시의 푸들’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노동당 내각에서도 이라크전 참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줄을 이었다.
2006년 상반기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들의 블레어에 대한 지지도는 26%에 불과했다. 이는 역대 노동당 총리 중 최악의 지지도다. 설상가상으로 8월 러시아에서 열린 G8 회담 때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른 부시가 블레어에게 면박을 주는 대화가 그대로 공개되면서 영국인들은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결국 9월 블레어가 “1년 안에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노동당은 새 당수와 함께 2007년 10월의 총선에 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블레어를 이을 새 당수는 누구일까?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10년을 기다려온 브라운 재무장관을 꼽는다. 23년간 동지적 관계를 이어온 블레어-브라운의 관계는 최근 들어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브라운 역시 지난 여름부터 “블레어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왔다”며 총리 사임을 촉구했다.
문제는 브라운이 블레어의 뒤를 이어 노동당의 승리를 이끌 만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과묵하고 신중한 브라운은 블레어처럼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연설가가 결코 아니다.
영국인들은 대체로 브라운 장관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가 이튼 출신의 젊은 보수당 당수 제임스 캐머런의 신선한 이미지와 경쟁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사태에 대해 블레어와 브라운 양쪽은 물론이고 두 사람과 절친한 관계인 또 한 사람의 핵심인물 피터 만델슨 EU무역부 장관 역시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만델슨은 다만 “노동당이 미치광이 같은 내분에서 이제 그만 벗어났으면 한다”며 “블레어와 브라운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 자신이 아닌, 국가의 안위를 위한 결단을 내릴 것이다”라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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