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의 생전 모습.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고종은 슬하에 9남4녀를 두었는데, 영친왕은 살아남은 세 아들 중 막내다. 고종은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돌연사했다. 총독부가 발표한 ‘공식적’인 사인은 뇌출혈이었지만, 사망 직후부터 총독부가 윤덕영 남작에게 지시하여 독살했다는 독살설과 영친왕의 결혼 문제로 자살했다는 자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고종의 급작스런 승하는 민족적 울분을 불러일으켜 50여 일 후 3·1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정작 고종의 장례는 일본 궁내성이 주관한 일본의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10년 강제 합방 이후, 법적으로 고종은 일본의 ‘황족’이었기 때문이다.
고종 슬하 9남4녀 … 황족들 ‘이중적 처신’
강제 합방 이후 일본 황실은 태황제 고종, 황제 순종, 황태자 영친왕을 각각 이태왕, 이왕, 왕세자 이공으로 책봉했다. 대한제국 황실로 보자면 한 단계씩 강등된 셈이지만, 일본 황실 처지에서 보자면 몰락 왕조를 황실의 새 식구로 받아들인 셈이었다. 이왕가로 강등되면서 대한제국 황실은 정치적 실권을 모두 잃었지만, 막대한 황실 재산은 고스란히 보존했다. 일제강점기 이왕가는 몰락한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라는 성격과 조선인 ‘일본 황실’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왕가’ 사람들 역시 이중적으로 처신했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은 후사가 없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폐위된 고종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보위에 오른 순종은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삼았다. 순종이 세 살 어린 의친왕 대신에 스물세 살 어린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은 것은 영친왕의 생모 엄비의 입김이 주효했다.
엄비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사실상 황후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06년 당시 황태자 신분이던 순종의 황태자비 책봉 때도 황실과 사돈을 맺으려는 가문들의 ‘로비’는 황실의 막후 실력자 엄비에게 집중됐다. 엄비는 50만원(현재 가치 500억원 상당)의 로비 자금을 아낌없이 뿌린 윤택영의 셋째 딸을 황태자비로 낙점했다. 1년 후 황태자비 윤 씨는 황후에 올라 엄비의 아들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영친왕은 황태자로 책봉된 직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대한제국 황족도 일본 황족과 똑같이 일본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메이지 천황의 칙어가 명분이었지만, 하야한 고종을 압박하기 위한 볼모 성격이 짙었다. 1907년 열한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영친왕은 그로부터 56년 후인 1963년에야 초라한 뇌중풍(뇌졸중) 환자의 모습으로 들것에 실려 귀국했다.
순종의 장인으로 ‘채무왕’으로 불린 윤택영 후작(왼쪽)과 그의 모친. 총독부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의 당사자인 윤덕영 남작(오른쪽)은 윤 후작의 형이다.
황실로부터 예물과 약혼반지까지 받은 민갑완은 얼굴도 보지 못한 영친왕을 10년을 두고 기다렸다. 영친왕과 마사코의 약혼 직후, 이왕가는 민갑완의 집에 상궁을 보내 약혼반지를 찾아오게 했다. 비탄에 젖은 민갑완은 10년 동안 간직한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주면서 “간택되어 약혼반지를 주었으나, 일본의 강압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반지를 강탈해간다”는 내용의 영수증을 요구했다. 민갑완은 영수증과 약혼반지를 교환하면서 울음을 터뜨리곤 혼절했다. 상궁은 민갑완이 혼절한 틈을 타 써주었던 영수증을 훔쳐 달아났다. 민갑완은 열 살 때 황실에 간택된 영예의 대가로 평생 수절하다가 1968년 부산에서 후두암으로 쓸쓸히 사망했다.
고종의 승하로 미뤄진 영친왕의 결혼식은 1년 후 도쿄에서 치러졌다. 일본 군부가 이왕가의 씨를 말리기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일본 황실 여인을 골라 영친왕과 결혼시켰다는 풍문도 있었지만, 영친왕 부부는 진(晉)과 구(玖) 두 아들을 두었다. 첫아들 진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사망했지만, 둘째 아들 구는 2005년 일흔다섯 살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강제 합방 이후 ‘왕세자 이공’으로 강등됐던 영친왕은 1926년 순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계승해 ‘이왕’에 올랐다. 순종은 강제 합방 이후 17년간 ‘창덕궁 이왕’으로 지내면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의 등쌀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채무왕(債務王)’이라고 불린 순종의 장인 윤택영 후작은 1920년 300만원(현재 가치 3000억원 상당)의 부채를 지고 중국 베이징으로 도주했다. 황태자비 책봉 때 황실에 뿌린 로비자금 50만원이 ‘채무왕’에 등극하게 된 계기였다. 윤택영은 순종이 황제에 오른 직후부터 타계하는 순간까지 무려 20여 년간 자신의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졸랐다. 순종이 빚을 갚아주지 않고 승하하자 윤택영은 베이징에서 엿장수로 떠돌다가 1935년 객사했다.
파렴치한 조선 귀족들이 황실 괴롭혀
순종에게 호시탐탐 돈을 뜯어간 이는 장인 윤택영 후작만이 아니었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76명의 귀족 중 절반에 가까운 33명이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끼니조차 때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생활고에 허덕였다. 몰락한 귀족들은 창덕궁 문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순종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용돈을 뜯어갔다.
‘이왕’을 승계한 영친왕은 ‘일본의 황족’이라는 신분을 기반으로 일본 군부에서 출세를 거듭했다. 엘리트 장교만 진학할 수 있는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31년 대좌(대령)로 진급해 보병 5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938년 소장으로 진급해 근위보병 제2여단장, 오사카 사단장을 역임했다. 1940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해 제1 항공군 사령관으로 광복을 맞았다. 영친왕의 일본 육사 2년 선배였던 홍사익 중장은 남방총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장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다가 패전 이후 전범 재판에 회부돼 교수형을 당했다. 몰락한 왕조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영친왕 역시 전범 재판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패전 이후 일본 황족의 특권이 박탈되면서 일본 황실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영친왕 역시 평민 신분이 되었다.
동양 역사상 대한제국 황실처럼 존엄한 대우를 받은 몰락 왕조는 일찍이 없었다. 일본은 패망한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지켜줬고, 해마다 엄청난 액수의 세비를 주었다. 일제강점기 이왕가를 괴롭힌 것은 일본이 아니라 파렴치한 조선 귀족들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 이왕가는 나라 잃은 조선인에겐 몰락한 비운의 황족으로 존경받았고, 일본인에겐 일본 황족으로 대우받았다. 그 탓에 광복 후 대한제국 황실은 역사의 미아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