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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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미아 탈출 ‘남영동’ 주민 김용화

“탈북 후 14년간 빠삐용 … 편견을 버려주세요”

  •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04-09-24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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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미아 탈출 ‘남영동’ 주민 김용화
    ”이제 제 이름과 나이를 되찾았습니다.” 지난 4월2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사무소. 49세의 한 남성이 난생 처음 주민등록증 발급을 신청했다. 탈북자 김용화씨. 무국적자 신세나 다름없던 ‘국제미아’에서 ‘남영동 주민’으로 거듭난 이 순간, 그는 오래 전부터 ‘또 다른 조국’의 상징으로 여겨온 서울 남산을 떠올렸고 30분 뒤 그곳 정상에 섰다. 발 아래 펼쳐진 서울 전경을 굽어보며 그는 나직이 되뇌었다. “이젠 죽어도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땅에 혼을 묻을 수 있다.”

    김씨를 얘기하자면 이름 석 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탈북자’란 수식어가 붙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탈북자 김용화’ 앞엔 ‘기구한’이란 형용사가 자연스레 붙는다.

    알려진 대로, 김씨는 함경남도 함흥철도국 단천기관차대 승무지도원으로 근무중이던 1988년 철도 화재사고와 관련한 문책을 피하려 탈북, 지난달 ‘북한 이탈 주민’으로 공식 인정받기까지 무려 14년간 중국과 베트남, 한국과 일본을 전전해야 했던 비운의 망명자다. 그가 그동안 거친 각국의 구치소와 외국인 수용소만도 16곳. 탈북자로 인정받기 위해 재판도 22차례나 받았다. 36세 때 시작된 길고도 험한 여정을 끝낸 그는 지금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까.

    김씨는 (재)한국농촌문화연구회 산하 농민교육원(경기 시흥시 목감동)에서 생활한다. 이곳을 찾은 4월26일 오전 때마침 한 탈북자가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독일대사관에 진입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최근에 입국한 여러 탈북자들이 제 소식을 듣고 찾아오곤 하지만, 되도록 안 만나려 해요. 실패한 제 인생을 들려주면 자칫 그릇된 전범(典範)이 될 것 같아서…. 단지 탈북자 중 누군가가 한 번은 걸어야 했을지 모를 길을 제가 먼저, 조금 오래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미아 탈출 ‘남영동’ 주민 김용화
    지난해 2월 재입국한 뒤 정부로부터 1년간의 한시적 합법 체류를 허락받은 김씨는 지금까지 줄곧 농민교육원에 머물렀다. 함남 단천 출신이자 먼 친척뻘인 김일주 한국농촌문화연구회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곳에서 일용직 인부로 일하는 그는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밭일을, 밤엔 이틀에 한 번씩 야간당직(경비)을 선다. 청소 등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는 건 일하는 동안만큼은 아픈 기억들을 지울 수 있기 때문. 그래서인지 북한에서는 농사 한번 지어본 적 없는데도 이젠 농사꾼이 다 됐다. “구내식당에서 소비할 무, 배추, 호박 등이 잘 자라나는 걸 보면 마음까지 흐뭇해진다”는 그는 “기계 계통에 관심이 많아 전기고장 수리도 곧잘 해내지만 남한에서 쓰는 전기부품엔 영문 표기가 많아 쉽지 않다”며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김씨에게는 자신이 왜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살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회한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 때도 많다. 그의 숙소는 농민교육원 한쪽에 자리한 8평짜리 외딴집. 동료 탈북자의 경조사 등 특별한 일이 없으면 좀체 교육원 밖을 나서지 않는 그는 이곳에서 “세상과 담을 쌓는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 여전히 남한 정부에 대한 섭섭함이 또아리를 튼다. 탈북 직후 중국과 베트남을 떠도는 7년 동안 현지 한국대사관이 망명 허용 대신 자신을 돌려보내는 데만 급급했던 일, 95년 6월 중국 산둥성에서 조각배에 몸을 싣고 70시간 바다를 건너 한국 밀입국에 성공했지만 정부에서 탈북자 인정을 거부해 자포자기한 채 일본 밀항을 감행했던 기억, 그가 북한 출신임을 주장한 다른 많은 탈북자들의 증언과 인민군 복무 시절 사진 등 증거자료가 충분한데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관련 기관들이 지난 2월 중국측의 ‘탈북자 통보’가 있기 전까지 한사코 자신을 불신했던 일, 자신의 탈북 때문에 북한에서 처형당한 두 동생에 대한 그리움 등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마다 김씨는 소주 한두 병을 마시며 옛 기억들을 씻어낸다. 그래도 그가 법무부를 상대로 낸 강제퇴거명령 무효확인 소송이 진행중이던 4년 전의 하루 5∼7병에 비하면 주량이 많이 줄어든 셈이다.

    김씨는 “황당한 남한 정부에 할 말은 많지만 가슴속에 묻기로 했다”면서도 자신을 담당했던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겐 꼭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제가) 중국인이면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고 남한 땅에 오려 했겠습니까? 외국인 등록을 강요하려면 차라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으로 등록하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중국 도피생활중 만든 위조 거민증을 트집잡아 지문 검사 한다며 지장을 찍게 한 뒤 ‘중국 송환을 희망한다’는 거짓 진술서를 멋대로 꾸미더군요.” 김씨는 지난해 11월 수사기관의 인권유린을 조사해 달라고 국가인권위원회에 낸 진정에 대한 회신을 지금까지 받지 못한 것도 불만이다.

    “해외를 떠도는 탈북자가 부지기수예요. 계층이 다양하다 보니 한국에 와서도 물의를 빚거나 적응에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정부가 더 다독거려야 하는데 탈북자 관련 인권단체들마저 정부를 의식해 소극적인 경우가 많아요. ‘탈북’보다는 ‘탈편견’이 더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러는 그도 수차례 신원보증을 서주고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게 도와준 조웅규 의원(한나라당)과 김일주 회장에게는 큰 신세를 졌다며 기사에 꼭 언급해 달라고 부탁한다.

    김씨는 얼마 전부터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린다. “인민군 중위로 제대해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교화국에서 근무한 18년 동안 몸이 무쇠 같았는데, 이젠 이렇게 됐네요.” 한국과 일본으로 밀항할 당시 홀로 0.5톤 쪽배를 몰 정도로 튼튼했던 몸이지만, 오랜 수감생활로 구석구석 아픈 곳이 많다. 추위도 많이 타 일주일 전에야 내의를 벗었다. 오른손도 저려 약을 먹고는 있지만, 건강보험 혜택이 없어 제대로 치료 한번 못 받았다. 95년 이후 3년간 한국에서 지낼 때 탈북자들로 구성된 ‘형제축구단’에서 뛰기도 한 축구광이지만, 이젠 언감생심일 뿐이다.

    부실해진 몸과 달라진 인생행로를 돌이키진 못해도 김씨에겐 희망 하나가 있다. 그는 5월중 3700여만원의 정착지원금을 받으면 조만간 교육원을 떠날 생각이다. 탈북자를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새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홀로 서기’를 감내하며 닥치는 대로 일하겠다는 각오다.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 외국인 수용소에 수감됐다 2000년 4월 가석방된 후 1년간 틈틈이 써둔 300여쪽의 옥중생활 수기를 바탕으로 인생역정을 되돌아본 자서전을 출간할 계획도 있다. 얼마 전 교육원을 찾아와 생일(4월8일)을 축하해 준 30여명의 탈북자 동료들도 그에게는 큰 힘. 외로움이 짙게 배인 그의 방 탁자 위에는 그날 사용하지 않은 케이크용 폭죽이 오롯이 놓여 있다. 그는 아직 폭죽을 터뜨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탈북 당시 생이별한 부인과 세 자녀가 내내 눈에 밟혀서일까.

    5월10일 주민증 발급을 앞둔 그는 며칠 전 자신의 주민등록등본을 떼보았다. ‘국적 취득에 의한 신규등록’이란 발급 사유 아래에 있는 가족관계란에는 달랑 그의 이름뿐. 그리곤 ‘이하 여백.’ 여백을 채워야 하는 건 김씨 몫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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