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45

2022.06.24

교통사고 극복하고 메이저 우승 거머쥔 임희정

[김종석의 인사이드 그린] 스윙 감각 잃지 않으려 아픈 몸으로 지속 출전… “이미지 트레이닝, 명상 큰 도움”

  • 김종석 채널A 성장동력센터 부장 (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입력2022-06-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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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9일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DB그룹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임희정 선수(가운데). [사진 제공 · 석교상사]

    6월 19일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DB그룹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임희정 선수(가운데). [사진 제공 · 석교상사]

    임희정(22·한국토지신탁 골프단)은 며칠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기억하기도 싫을 법한 교통사고 사진 4장을 올렸다. “사실 이렇게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메이저대회인 한국여자오픈을 우승해서 너무너무 기쁩니다”라는 글과 함께.

    사연은 이렇다. 임희정은 4월 경기 여주시 한 골프장에서 열리는 프로암대회에 출전하려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타고 이동하다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량이 나들목 시설물과 충돌했는데 폐차를 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사고 당시 자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임희정은 다행히 큰 부상은 면했지만 목, 어깨, 허리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몸에는 타박상 정도만 있었으나 근육이 쉽게 굳어 힘들었다.

    골프 인생에 위기를 맞았음에도 임희정은 그동안 교통사고 언급 자체를 피하려 했다. 그의 한 지인에 따르면 “임희정 프로가 사고를 핑계로 약해질 수 없다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더 강한 정신력을 발휘했다”고 전했다.

    큰 시련을 겪은 임희정은 6월 19일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DB그룹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모처럼 활짝 웃었다.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최고 무대에서 그는 최종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대회 최저타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지난해 KLPGA투어를 평정한 디펜딩 챔피언 박민지가 그를 추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올 시즌 첫 승이자 통산 5승을 올린 임희정은 우승 상금 3억 원을 더해 시즌 상금 2위(4억619만 원)로 점프했다. 우승 후 임희정은 비로소 힘들었던 지난날에 대해 입을 열었다.

    19언더파 269타로 최저타 기록 경신

    임희정 선수는 4월 교통사고로 골프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임희정 인스타그램 캡쳐]

    임희정 선수는 4월 교통사고로 골프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임희정 인스타그램 캡쳐]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아 속상할 때가 많았어요. 아프다고 언제까지나 쉴 수는 없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샷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 계속 출전했죠.”



    사고 후유증으로 임희정은 메이저대회인 KLPGA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76타를 친 뒤 기권한 데 이어, 5월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는 2라운드 중간 합계 2오버파 146타로 컷 탈락했다. 대회 초반 잘하다가다도 뒷심이 달려 마지막 라운드에 스코어가 치솟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임희정과 용품 계약을 한 석교상사(브리지스톤골프 용품 수입 총판)의 신용우 상무는 “대회 때도 매일 근처 병원 또는 침술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거나 침을 맞아야 했다. 연습 전 몸 푸는 시간을 늘렸고 플레이 도중에도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임희정은 “이미지 트레이닝과 명상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문제점을 찾기보다 스스로를 믿자는 생각으로 경기를 치렀다”고 말했다. 명상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자기 전에 반복적으로 했으며 불안하거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추가로 했다고 한다.

    임희정의 심리코칭을 담당하는 정그린 그린코칭솔루션 대표는 “임 프로는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최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목표 의식이 강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4~6주마다 웨지를 교체할 만큼 연습 벌레로 불리는 임희정 선수. [사진 제공 · KLPGA]

    4~6주마다 웨지를 교체할 만큼 연습 벌레로 불리는 임희정 선수. [사진 제공 · KLPGA]

    교과서적인 완벽한 스윙을 하는 임희정은 연습 벌레로도 유명하다. 2019년 KLPGA투어에 데뷔해 3승을 올리고도 그는 신인상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당시 27개 대회에서 7차례 컷 탈락하면서 신인상 포인트를 쌓지 못하는,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관성 향상에 집중한 그는 2020년 17개 대회에 출전해 100% 컷 통과에 성공한 뒤 지난해에도 28개 대회에 출전해 한 차례 실격을 제외하면 모두 컷을 통과했다.

    김재열 SBS 골프해설위원은 “처음 투어에 들어왔을 때보다 웨이트와 근육량이 증가해 힘이 붙었고 더욱 견고하고 절제된 스윙을 하고 있다”며 “스윙 리듬과 템포, 메커닉은 KLPGA투어를 떠나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스코어와 직결되는 쇼트 게임 훈련에 매달린 그는 50m 이내 샷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매일 2시간 이상 공 수백 개를 친다. 석교상사 관계자는 “임희정은 빠르면 4주, 늦어도 6주마다 웨지를 바꾼다. 반납하는 웨지를 보면 페이스 면이 너무 닳아 있어 놀랄 정도”라며 “일반 여자 프로골퍼는 3~4개월마다 바꾸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에는 ‘벤 호건 상’이 있다. 불굴의 투혼으로 부상을 이겨낸 선수에게 주는 일종의 재기상이다. 전설의 골퍼 호건은 1949년 피닉스오픈 연장전에서 패한 뒤 직접 차를 몰고 귀가하다 차선을 넘어온 버스와 정면충돌했다. 목뼈, 무릎, 갈비뼈, 골반 등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호건은 “다시 걷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 진단까지 받았지만 사고 1년 만인 1950년 US오픈에서 우승하며 부활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2019년 ‘벤 호건 상’을 받았다. 허리와 무릎 수술을 여러 차례 받은 우즈 역시 선수 생활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깨고 PGA투어 통산 80승 고지를 밟았다. 지난해 2월 자동차 전복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친 우즈는 지난 연말 아들 찰리와 이벤트 대회인 PNC 챔피언십을 통해 필드에 복귀해 기적에 가깝다는 찬사를 들었다.

    매일 2시간씩 쇼트 게임 연습

    KLPGA투어에도 ‘벤 호건 상’이 있다면 올해 수상자는 임희정이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임희정은 우즈와 같은 모델의 골프공을 사용하고 있다.

    강원 춘천시에서 태어난 임희정은 어머니 고향인 태백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8세 때 우연히 골프연습장에 들렀다 골프를 시작했다. 레슨 코치를 구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동영상으로 레슨을 받기도 했다. 주니어 시절 강자로 이름을 날린 임희정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단체전 은메달을 합작했다. 2000년에 태어난 임희정, 박현경, 조아연과 함께 한국여자골프 차세대 트로이카로 주목받았다.

    어렵게 운동해서인지 프로 데뷔 후 성공가도를 달리면서도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적극적이다. 올해 초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 2022만 원을 기부했다. 지난 시즌 대회에서 버디, 이글을 기록할 때마다 적립한 기금에 회원들의 모금을 합했다. 지난해부터 임희정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이민기 석교상사 회장은 “골프를 향한 열정뿐 아니라 생각도 깊다. 주위를 배려하는 성숙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진영 프로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말했다.

    임희정의 별명은 ‘사막 여우’다. 아마추어 국가대표 시절 동료 박현경이 “웃는 모습이 비슷하다”며 붙여줬다고 한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는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건 그 꽃에 쏟은 시간 때문이야”라는 명문이 나온다. 지구를 찾은 어린 왕자가 수천 송이의 장미를 보고 실망하자 사막 여우가 해준 말이다.

    임희정은 신인 시즌에 3승을 한 뒤 2년 가까이 우승이 없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정신이 해이해져 골프에 대한 절박함이 사라진 탓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초심을 떠올렸다. 클럽에 공이 맞는 타구감이나 홀에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무척 좋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한 타의 소중함을 다시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어느새 임희정에게 골프는 자신만의 장미꽃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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