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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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

  • 박진성 도서출판 늘품미디어 상임연구원

    입력2006-11-06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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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
    여기 한 장의 영화 포스터가 있다. 영화 제목은 ‘가족의 탄생’. 제목으로 추측컨대 가족사진인 듯하지만, 꽃병과 촛대로 장식된 식탁에 차려진 떡볶이와 순대, 어묵만큼이나 사진 속 ‘가족’ 구성원의 관계는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도무지 누가 부모이고 자식인지, 삼촌이나 고모(이모)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가족사진’만으로는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가늠할 수 없다.

    이렇듯 수상한 가족사진(포스터)만큼이나 ‘수상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가족의 탄생’을 이 자리에서 다루는 이유는, 대학 입시에서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한 양상으로 가족의 형태 및 개념의 변화와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묻는 논제가 자주 출제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앙대 2006학년도 정시 논술고사다. 가족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심층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논제에 접근하는 문제였다.

    가족, 정말 해체되고 있나

    가족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정서적 의미는 화목, 사랑, 온정, 안식, 포용 등이다. 대체로 애틋하고 그리운 그 무엇을 담고 있다. 가령 5년간 소식을 끊었다가 돌아온 남동생 ‘형철’(엄태웅 분)을 설렘과 기쁨의 눈물로 맞는 ‘미라’(문소리 분)의 애틋함이나 철없는 낭만주의자인 엄마 ‘매자’(김혜옥 분)의 ‘애정행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선경’(공효진 분)의 눈빛 속 그리움은 우리 모두가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대변한다. 사실 가족공동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가치는 이와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영화 초반부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다. 군대에서 전역한 후 소식이 없는 남동생을 기다리며 홀로 집을 지키는 미라, 어느 날 걸려온 동생의 전화에 가슴을 설레며 동생을 맞는 미라에게 5년 만에 돌아온 형철이 소개하는 사람은 이모뻘은 족히 됨직한 부인 무신 씨다. 그러면서 형철은 미라에게 능청스레 말한다. “누나, 나 결혼했잖아.” 나이 지긋한 올케와 어색한 동거가 이어지던 어느 날, 네다섯 살 된 소녀 채현이 미라의 집에 찾아와 엄마 무신을 찾는다. 게다가 채현은 무신의 친딸도 아닌 ‘전남편의 전 부인의 딸, 그쯤’ 된단다. 미라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이 묘한 동거 중에 형철은 홀로 집을 나가 또다시 소식을 끊는다.



    한편, 아버지가 죽은 후 평생 사랑을 좇는 엄마 매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 선경은 어머니와 떨어져 혼자 산다. 딸이 사는 모습이 궁금해 일부러 선경의 집을 찾은 매자를 선경은 매정하게 문전박대한다. 엄마 애인인 운식(주진모 분)이 찾아와 매자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는데도 선경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선경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어린 남동생 경석이 있지만, 선경은 엄마가 미운 만큼 경석이도 밉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매자는 딸과 화해하려고 하지만 선경은 번번이 거절한다. 그나마 엄마 대신 경석의 유치원 운동회에 참가하는 것이 선경으로서는 엄마와 경석에 대한 최대의 배려다. 매자는 끝내 딸과 화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엄마가 남긴 유품 속에 유년 시절 자신의 물건이 들어 있음을 발견한 선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오열한다.

    미라와 선경의 1인 가족(이런 용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는 더 논의해야겠지만), 끊임없는 여성편력(또는 남성편력)으로 부유(浮遊)하는 형철과 매자, 부모의 부재로 남매만이 사는 미라와 형철, 선경과 경석 남매, 친부모와 살 수 없는 채현.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 가족의 구성은 부모와 그들의 2세인 자녀들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가족 형태와 비교할 때 분명 다르다. 영화의 이런 가족 유형에 이혼 가정의 형태를 추가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가족해체’의 대략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의 형태를 띠지 않는 가족 구성을 두고 흔히 ‘가족해체 현상’이라는 용어를 쓴다. 용어에서 느껴지듯이 가족해체에 관한 담론에서는 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비판적 시각을 접할 수 있다. 심한 경우 가족해체가 마치 심각한 사회문제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론에서는 ‘가족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정답인 양 도출된다.

    물론 가족의 가치를 회복, 보존하는 것은 당위적이다. 도대체 누가 개인에게 최후 안식처이자 희망의 공동체인 가족의 따스함을 거부하고 ‘가족은 없어져야 하며 가족의 회복은 무의미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형태 변화 양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묻는 논제의 결론으로 위에서 언급한 당위론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뻔한 결론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아마 대부분 학생들이 가족의 가치와 관련해 이런 당위론을 내세울 테니 애초에 ‘자신의 생각’이란 것이 성립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변화에 대한 심층적인 사고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과연 가족 형태의 변화가 가족의 가치마저 소멸되는 가족해체일까’라는 문제 제기와 함께 가족의 형태가 다양화하는 양상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런 변화에 따라 현대사회의 가족 형태와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모색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핏줄이 당긴다

    비판적인 가족해체 담론의 양상과 그에 따르는 당위적 결론은 ‘무릇 가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엄숙한 전제 위에 성립한다.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강력한 공동체 의식은 ‘한 핏줄, 한 민족’이라는 수사(修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혈연관계에 의해 강화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혈연공동체인 가족은 사회 구성의 기본단위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따라서 한 핏줄로 엮인 가족은 신성불가침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가족해체 담론이 당위적 결론으로 이어지는 배경이다.

    공동체 성립의 기본 요건이 동질성의 유무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가족이 전적으로 혈연이라는 동질성을 매개로 구성되는 공동체라는 데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가족 = 혈연공동체’라는 오래된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지는-방정식이 얼마나 타당성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성생식은 자기복제가 아니므로 ‘나’의 자녀는 내 유전자의 2분의 1을, 손자는 4분의 1만을 갖게 되고, 세대가 지날수록 이 유전적 동일성은 점차 희박해진다고 말한다. ‘유전자’를 핏줄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나의 자녀는 내 피의 절반, 손자는 반의 반만 나와 공유하게 될 것이고, 세대가 지날수록 내 자손에게 흐르는 ‘내 피’는 더욱 묽어질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난 후 내 자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내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즉, 혈연에 근거한 공동체 의식이 생물학적으로는 그다지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혈연공동체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은 민족의 차원에서라면 모를까, 불과 2~3세대로 구성되는 가족에 적용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 어쨌든 ‘내’ 손자는 나와 발가락이라도 닮았을 것이며, ‘나’처럼 20대 중반에 벌써 앞머리가 빠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가족공동체를 매개하는 혈연이 바로 인류의 종족 보존 수단이었음을 감안할 때, 혈연공동체로서 가족의 의의를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혈연에 집착한 나머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위협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혈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크게는 쇼비니즘, 작게는 가족주의로 변질된다. 독일 나치즘의 역사는 이 모두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전자의 예라면, 독일이 패망하고 히틀러가 자살하자 아내와 6명의 자녀를 죽이고 자살한 나치 선전대 괴벨스는 후자의 예에 속한다. 괴벨스 식 가족주의는 이미 백제의 장군 계백도 몸소 실천한 바 있다. 계백과 괴벨스가 자신의 죽음에 앞서 가족들에게 죽음을 강요한 것은 가족에 대한 핏줄이 당겨서일까.

    ‘가족의 탄생’

    이처럼 혈연이 가족공동체를 이루는 유일한 요건이 아니라면, 가족을 ‘탄생’시키는 매개로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영화 ‘가족의 탄생’의 결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이 많은 처녀 채현(정유미 분)을 사랑하는 총각 경석(봉태규 분)은 도무지 자신에게 ‘집중해주지 않는’ 채현이 못마땅하다. 채현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경석은 채현을 마중 나온 채현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채현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된다. 그런데 채현은 어머니가 둘이다. 어느덧 할머니가 된 무신과 중년 여인이 된 미라가 그들이다. 채현은 이들을 ‘엄마들’이라 부르며 스스럼이 없다. 이유인즉 형철이 집을 나간 후, 미라의 집에 남겨진 무신과 채현은 그대로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독특한 가족의 식사는 어느 가정 못지않게 정겹기만 하다. 이 영화에는 유난히 주인공들의 식사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무신과 미라, 채현, 경석이 함께 맞는 저녁식사에서는 오도카니 앉아 홀로 식사하는 선경의 모습이나 선경과 경석 두 남매가 덩그러니 남아 저녁을 먹는 모습, 형철이 떠난 후 어색하게 마주 앉은 미라와 무신의 식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가족적 분위기가 진하게 묻어난다.

    아무런 혈연적 동질성이 없는 이 네 사람이 가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서로의 신산한 삶과 상처를 이해하고 감싸안는 애정을 바탕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가족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결합과 혈연의 우열을 따지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혈연의 확산이 결혼이라는 형식의 결합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사회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가족 형태는 혈연적 동질성이라는 전통적인 매개와 더불어 독신주의, 재혼, 입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른바 ‘가족의 탄생’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족 형태의 다양화는 ‘가족해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혈연주의의 해체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그들이 단지 피를 나눈 혈연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통해 안식을 얻고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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