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애제자 허련이 그린 \'환당 선생 초상\'.
추사에게는 늘 ‘동아시아 서예문화 최후의 거장’ ‘학예(學藝) 일치의 대예술가’ ‘일세(一世)의 통유(通儒)’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이러한 현란한 평가와 ‘우리가 진실로 추사를 얼마나 아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추사는 위대한 학자와 예술가를 넘어 신격화되기도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작품값 덕에 속물화되기도 한다. 신격화도, 속물화도 추사의 뜻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추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왜 추사에 주목하는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추사는 천재이기 이전에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노력의 화신이며, 서화가 이전에 경학자(經學者)라는 점에도 유념해야 한다.
청나라 대가들도 인정한 학문적 천재성
추사의 일생은 영광과 환희에 찬 전반기와 고뇌에 찬 후반기로 극명히 나뉜다. 종척(宗戚) 가문이라는 후광과 타고난 천재성을 기반으로 다다른 학문적 경지는 청나라 노대가들도 인정할 정도였으며, 이로 인해 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제주 유배 이후부터 시작되는 추사 인생의 후반기는 육체적으로는 인생의 황혼기였으나 예술적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추사 예술의 백미는 역시 ‘추사체’
추사라는 인물은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까다롭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는 증언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도량은 무척 넓어서, 서얼이건 중인이건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문하에 받아들여 학문과 예술을 교유했다. 추사가 서거하자 사관은 ‘철종실록’에서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했다. 그가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아시아 최고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꼽히는 소동파에 비교된 것은 죽은 그에게 한 가닥 위안이 됐을지도 모른다.
추사에 대한 숱한 논문이 나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의 가장 유명한 호인 ‘추사(秋史)’의 의미와 유래를 알지 못한다. 최고의 추사 연구자로 평가되는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의 ‘청조 문화 동전(東傳)의 연구’를 능가하는 연구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도 반성할 일이다. 그리고 그의 글씨, 그림, 불교학 등에 대한 분과학적 접근은 시도되고 있지만, 동아시아의 사상사와 예술사에서 추사의 위상 등에 대한 종합적 연구는 아직 시도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중대한 한계다. 유불선, 문사철, 시서화를 겸비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문주의자로서의 추사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사는 근대적 분과학이 아닌 새로운 통합적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모범으로 주목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추사를 주목하는 이유다.
추사의 그림은 ‘먹을 금처럼 아껴가며’ 심의(心意)를 표출한 것으로, 문인화의 정수(精髓) 자체라 할 수 있다. 추사 예술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그의 글씨다. 추사의 글씨는 단 한 글자가 쓰여도 여러 글씨체의 기운이 융합되고, 강약과 대소가 자유자재로 녹아 있어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글자 한 점, 한 획은 중국 역대 금석문(金石文)에 근거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추사 예술의 위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청나라에서 난숙한 고증학의 예술적 체현을 추사의 글씨 속에서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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