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을 갖고 있다. 장동건이나 정우성 같은 꽃미남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 같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여균동 감독은 한때 감독보다는 배우로 더 유명했다. 장정일 원작,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년)에서 그는 발기 불능인 은행원 역을 맡아 그해 청룡영화제에서 남자신인상을 받았다.
1994년에 여균동은 배우로도 주목받았지만 첫 감독 데뷔작인 ‘세상 밖으로’(1994년)로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다음 해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까지 받았다. 문성근, 이경영이 탈옥수로 나와 휴전선까지 올라가며 질펀하게 던지는 육두문자가 화제였다. 세상 밖으로 떠나는 그들의 여행에 심혜진이 동참한다. 경직된 남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발칙한 작품이었다. “도대체 넌 정체가 뭐야? 감독이야, 배우야?” 이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법도 하다.
감독, 배우, 제작자까지 영화계 ‘팔방미남’
1959년생인 그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80년대에는 마당극 같은 문화운동을 하다가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년) 연출부에 들어가면서 영화연출에 관심을 가졌다.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1992년)를 각색했고 그 후 ‘세상 밖으로’로 감독 데뷔한 뒤, 포르노의 환상으로 내적 압박에 시달리는 남자를 그린 영화 ‘맨?’(1995년), 영화에 관한 영화 ‘죽이는 이야기’(1997년), 그리고 몸에 대한 화두를 던진 ‘미인’(2000년) 등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여균동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작품의 각본을 100% 본인이 직접 썼다.
배우로서 여균동은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년)에서 사원 역을 맡아 연기했고, 역시 장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맨?’, ‘박봉곤 가출사건’(1996년), ‘이재수의 난’(1998년), ‘주노명 베이커리’(1999년) 등에서 조연이나 주연으로 출연했다. 특히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균동 감독은 재능이 많다. 각본, 감독, 연기에서 그는 한국 영화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인’ 이후 오랫동안 침묵했다. ‘쉬리’ 이후 급물살을 탄 한국 영화 제작현장에서 그를 비롯한 중견 감독들은 빠른 속도로 밀려났다. IMF 이후 급변한 영화 제작환경은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신인 감독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가 ‘미인’ 이후 시나리오를 만지고 있던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의 펀딩은 계속 미뤄졌다. ‘비단구두’에 대한 투자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물론 상업성이 약하다는 제작자들의 판단 때문이다. 결국 ‘비단구두’의 제작이 늦어진 것은 2000년대 이후 변화된 한국 영화산업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왜 그렇게 5년 동안이나 ‘비단구두’의 제작에 집착했는지 궁금했다.
“감독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연애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주변에서 ‘네가 그렇게 원하는 여자가 저 여자냐?’ 하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현재의 의미가 중요하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남들이 된다, 안 된다 말해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 그 열병이 지나가면 시름시름 앓고, 그러다가 또 연애를 시작한다. 이게 병이다.”
천신만고 끝에 직접 ‘오리영화사’라는 회사를 차린 뒤 3억원이라는 초저예산의 제작비를 들고 HD 카메라로 촬영했지만 ‘비단구두’의 운명은 제목처럼 그렇게 호사스럽지 못했다. 지난해 2월 크랭크인해 4월에 촬영이 끝났고 8월에 후반작업도 끝났지만, 배급을 맡아줄 회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스태프 중 몇 사람이 약속된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뒤늦게 ‘비단구두’가 개봉하게 된 것은 영화진흥위원회의 개봉작 지원과 시네큐브의 도움 덕분이다. 대구의 한 극장에서도 상영이 되고, 전국의 아트플러스 체인 극장 중에서 디지털 상영이 가능한 극장을 몇 군데 더 돌 생각이다. 시네큐브도 개관 이래 디지털 상영은 처음이다. 제작자이며 감독인 여균동은 아직도 돈을 받지 못한 스태프들에게 다음 작품 연출료를 받으면 가장 먼저 변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감독들도 많아져야 한다. 중견 감독들 입장에서는 영화 만드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이 개탄스러울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예전에도 그랬다. 이번에 저예산 영화 하면서 느낀 것은 영화계에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업적 흥행 영화에 대한 감독의 선호도가 커진 반면, 저예산 영화는 상대적으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제작비 10억원으로 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5만 명만 들어도 손해는 안 본다. 그런데 10억원 미만으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관객이 1만 명 이상 드는 영화가 거의 없다. 이전에는 3만~4만 명 드는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면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제는 중간지대가 거의 사라지고 양극만 존재한다.”
“진짜 하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
‘비단구두’는 치매에 걸린 실향민 배 영감(민정기 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북한에 있는 그의 고향과 비슷한 세트를 만들어 그를 안내하라는 협박을 조폭에게서 받은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다. 배 영감 역을 맡은 민정기 씨는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에서 이발소 그림으로 관심을 모았던 화가다.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이 연기 경험의 전부인 민 화백은 치매에 걸린 실향민 역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 규모에 맞고 수준에 맞는 방식이 있으면 좋은데, 지금 바닥을 치고 있다. 절망만이 있는 것은 아닌데 거의 바닥으로 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각양각색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다양한 영화가 나와야 할 것이다. 대자본의 영화에만 기댈 수는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소자본의 영화가 제작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제작의 수지타산 포인트는 점점 낮아지는데 관객의 욕망은 획일화돼가고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여균동 감독의 다음 작품은 사극. 지금까지는 자신이 전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했지만 이번에는 외도하듯 어느 영화사의 기획 작품을 연출할 생각이다. 조선시대 뒷골목 이야기라고 한다. ‘딱 이거다’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는 여전히 그늘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삐딱하게 노는 애들이나 없는 녀석들,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내가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 있어서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엔 무관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방법이 없겠니?’ 하고 약장사처럼 떠들고 다닌다. 자본으로부터 내 약발이 점점 감소한다는 생각이 든다. 노가리 푸는 행위를 그만두고 잠시 침묵하면서 내 감각이 일반화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미인’을 끝낸 뒤 나는 더 개인화되고 내면화됐다. 내가 관심 있는 것에 타인도 관심이 있어야 영화가 가능한데 ‘이런 거 재미있지?’ 하고 물었는데 사람들이 심드렁하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오랫동안 와신상담하면서 여균동 감독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많이 던졌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왜 영화를 하는가, 영화는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영화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요즘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번에 해보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것만도 아닌 듯하다. 나에게 영화는 이전에 비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도 사는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1994년에 여균동은 배우로도 주목받았지만 첫 감독 데뷔작인 ‘세상 밖으로’(1994년)로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다음 해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까지 받았다. 문성근, 이경영이 탈옥수로 나와 휴전선까지 올라가며 질펀하게 던지는 육두문자가 화제였다. 세상 밖으로 떠나는 그들의 여행에 심혜진이 동참한다. 경직된 남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발칙한 작품이었다. “도대체 넌 정체가 뭐야? 감독이야, 배우야?” 이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법도 하다.
감독, 배우, 제작자까지 영화계 ‘팔방미남’
1959년생인 그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80년대에는 마당극 같은 문화운동을 하다가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년) 연출부에 들어가면서 영화연출에 관심을 가졌다.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1992년)를 각색했고 그 후 ‘세상 밖으로’로 감독 데뷔한 뒤, 포르노의 환상으로 내적 압박에 시달리는 남자를 그린 영화 ‘맨?’(1995년), 영화에 관한 영화 ‘죽이는 이야기’(1997년), 그리고 몸에 대한 화두를 던진 ‘미인’(2000년) 등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여균동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작품의 각본을 100% 본인이 직접 썼다.
배우로서 여균동은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년)에서 사원 역을 맡아 연기했고, 역시 장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맨?’, ‘박봉곤 가출사건’(1996년), ‘이재수의 난’(1998년), ‘주노명 베이커리’(1999년) 등에서 조연이나 주연으로 출연했다. 특히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균동 감독은 재능이 많다. 각본, 감독, 연기에서 그는 한국 영화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인’ 이후 오랫동안 침묵했다. ‘쉬리’ 이후 급물살을 탄 한국 영화 제작현장에서 그를 비롯한 중견 감독들은 빠른 속도로 밀려났다. IMF 이후 급변한 영화 제작환경은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신인 감독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가 ‘미인’ 이후 시나리오를 만지고 있던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의 펀딩은 계속 미뤄졌다. ‘비단구두’에 대한 투자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물론 상업성이 약하다는 제작자들의 판단 때문이다. 결국 ‘비단구두’의 제작이 늦어진 것은 2000년대 이후 변화된 한국 영화산업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왜 그렇게 5년 동안이나 ‘비단구두’의 제작에 집착했는지 궁금했다.
“감독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연애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주변에서 ‘네가 그렇게 원하는 여자가 저 여자냐?’ 하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현재의 의미가 중요하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남들이 된다, 안 된다 말해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 그 열병이 지나가면 시름시름 앓고, 그러다가 또 연애를 시작한다. 이게 병이다.”
천신만고 끝에 직접 ‘오리영화사’라는 회사를 차린 뒤 3억원이라는 초저예산의 제작비를 들고 HD 카메라로 촬영했지만 ‘비단구두’의 운명은 제목처럼 그렇게 호사스럽지 못했다. 지난해 2월 크랭크인해 4월에 촬영이 끝났고 8월에 후반작업도 끝났지만, 배급을 맡아줄 회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스태프 중 몇 사람이 약속된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뒤늦게 ‘비단구두’가 개봉하게 된 것은 영화진흥위원회의 개봉작 지원과 시네큐브의 도움 덕분이다. 대구의 한 극장에서도 상영이 되고, 전국의 아트플러스 체인 극장 중에서 디지털 상영이 가능한 극장을 몇 군데 더 돌 생각이다. 시네큐브도 개관 이래 디지털 상영은 처음이다. 제작자이며 감독인 여균동은 아직도 돈을 받지 못한 스태프들에게 다음 작품 연출료를 받으면 가장 먼저 변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감독들도 많아져야 한다. 중견 감독들 입장에서는 영화 만드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이 개탄스러울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예전에도 그랬다. 이번에 저예산 영화 하면서 느낀 것은 영화계에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업적 흥행 영화에 대한 감독의 선호도가 커진 반면, 저예산 영화는 상대적으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제작비 10억원으로 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5만 명만 들어도 손해는 안 본다. 그런데 10억원 미만으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관객이 1만 명 이상 드는 영화가 거의 없다. 이전에는 3만~4만 명 드는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면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제는 중간지대가 거의 사라지고 양극만 존재한다.”
“진짜 하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
‘비단구두’는 치매에 걸린 실향민 배 영감(민정기 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북한에 있는 그의 고향과 비슷한 세트를 만들어 그를 안내하라는 협박을 조폭에게서 받은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다. 배 영감 역을 맡은 민정기 씨는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에서 이발소 그림으로 관심을 모았던 화가다.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이 연기 경험의 전부인 민 화백은 치매에 걸린 실향민 역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 규모에 맞고 수준에 맞는 방식이 있으면 좋은데, 지금 바닥을 치고 있다. 절망만이 있는 것은 아닌데 거의 바닥으로 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각양각색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다양한 영화가 나와야 할 것이다. 대자본의 영화에만 기댈 수는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소자본의 영화가 제작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제작의 수지타산 포인트는 점점 낮아지는데 관객의 욕망은 획일화돼가고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여균동 감독의 다음 작품은 사극. 지금까지는 자신이 전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했지만 이번에는 외도하듯 어느 영화사의 기획 작품을 연출할 생각이다. 조선시대 뒷골목 이야기라고 한다. ‘딱 이거다’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는 여전히 그늘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삐딱하게 노는 애들이나 없는 녀석들,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내가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 있어서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엔 무관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방법이 없겠니?’ 하고 약장사처럼 떠들고 다닌다. 자본으로부터 내 약발이 점점 감소한다는 생각이 든다. 노가리 푸는 행위를 그만두고 잠시 침묵하면서 내 감각이 일반화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미인’을 끝낸 뒤 나는 더 개인화되고 내면화됐다. 내가 관심 있는 것에 타인도 관심이 있어야 영화가 가능한데 ‘이런 거 재미있지?’ 하고 물었는데 사람들이 심드렁하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오랫동안 와신상담하면서 여균동 감독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많이 던졌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왜 영화를 하는가, 영화는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영화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요즘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번에 해보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것만도 아닌 듯하다. 나에게 영화는 이전에 비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도 사는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