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스노, ‘Authorization-사진사의 초상’, 1969.
먼저 그는 텅 빈 거울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즉석에서 현상된 사진은 거울에 테이프로 표시된 사각형의 한쪽 귀퉁이에 붙여진다. 그것이 거울 속 사진사의 모습을 4분의 1가량 잡아먹는다. 이어서 같은 위치, 같은 각도에서 또 한 번 셔터를 누른다. 곧바로 카메라 밑으로 삐져나온 사진은 앞 사진의 오른쪽에 나란히 붙여진다. 이제 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모습은 절반이 가려졌다.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사진은 두 사진의 아래쪽에 배치되고, 이로써 사진사의 모습은 4분의 3이 사라진다. 이제 다시 그것을 찍어 남은 귀퉁이에 붙이면 테이프로 표시된 거울 위의 사각형에서 작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럼 이제 찍을 것은 하나뿐이다. 사진사를 집어삼켜 버린 넉 장의 사진. 그것을 찍은 마지막 사진은 거울의 왼쪽 상단으로 올라간다.
사진적 행위
“주체는 자신의 복제 때문에 점진적으로 매장되고, 언제나 이미 지나간 순간을 고착시키는 재현에 의해 각각의 조준과 촬영 순간마다 조금씩 삼켜지고 지워진다.” 여기서 “주체는 사진적 행위에 의해, 그리고 그 행위 속에서 완전히 용해된다.” 주체가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작가의 얼굴을 집어삼킨 다섯 장의 사진으로 표상되는 것, 즉 사진을 찍는 이미지 행위(image-acte)뿐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즈,‘시녀들’, 1656.
이는 물론 당시에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이라 부르고, 탈근대 철학자들이 ‘주체의 죽음’이라 불렀던 것의 사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미학에서는 예술가를 타고난 ‘천재’로 보든, 아니면 후천적인 ‘장인’으로 보든 작품을 작가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을 ‘영매’로 간주하곤 한다. 이 경우 작품은 작가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어떤 객관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사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실재의 거울
뒤바는 이 작품을 작가의 주관성의 표현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의 작동(une mise en acte)으로 본다. 이는 물론 진리의 발동(ins Werk Setzen)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불역한 것이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그린다’는 행위 자체다. 뒤바 역시 스노의 작품에서 작가를 지우고 그것을 ‘찍는다’는 행위로 환원시킨 뒤, 이제까지 사진 이론에서 그 행위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해왔는지 추적해 들어간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 ‘포토제닉 드로잉’, 1840.
사진도 일종의 기호라면,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에 카메라가 발명됐을 때 당장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진이 현실을 빼어나게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사진은 현실을 쏙 빼닮은 도상기호였다. “사진과 영화는 그 속성상 사실주의의 강박관념을 충족시켜 준다.” 현대 회화가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주고 추상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19세기 사진 이론에서 사진은 무엇보다도 ‘실재의 거울’이었다.
실재의 변형
하지만 우리는 이게 얼마나 소박한 생각인지 잘 알고 있다. 사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해서 보여준다. 루돌프 아른하임에 따르면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이미 관습적 도식, 즉 문화적으로 형성된 지각의 코드를 적용한다. 인류학의 연구 역시 문명 이전 사회에 사는 부족들은 종종 사진을 보고도 이해를 못한다고 보고한다. 이 역시 사진의 바탕에는 해독을 위해서 따로 배워야 할 어떤 관습적 코드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게다.
사진은 거울처럼 실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게 아니라 대개는 현실을 변형시켜 제시한다. 가령 지난번에 본 로젠탈의 사진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굳이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아도 사진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무엇을 찍을까, 어떻게 찍을까를 결정할 때부터 이미 사진 속에 찍히는 세계는 찍는 사람의 머릿속의 관념에 따라 변형되게 마련이다. 사진은 세계의 그림이기 이전에 그것을 찍는 이의 머릿속 그림이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 ‘포토제닉 드로잉’, 1840.
이 때문에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에서는 사진의 바탕에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사진은 그림이기 이전에 관념이라는 것이다. 사진이 일종의 감추어진 텍스트라면, 그것은 도상기호가 아니라 상징기호가 되는 셈이다. 20세기 초의 사진 이론은 사진을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실재의 변형’으로 보았다. 사진은 세계를 찍는 이의 관념에 맞게 세계를 변형시켜 제시한다. “글자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이 될 것”이라는 베냐민의 언급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실재의 자국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사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한다. 이미 루돌프 아른하임은 “물리적 대상들은 그들의 이미지를 빛의 광학적, 화학적 반응을 통해 스스로 자국으로 남긴다”고 말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진은 도상기호가 아니다. 사진기는 현실을 재현할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반사광과 감광물질 사이의 광학적, 화학적 인과관계뿐이다.
이는 특히 포토그램에서 잘 나타난다. 탈보트는 피사체를 인화지 위에 올려놓고 바로 현상하는 ‘포토제닉 드로잉’을 선보였다. 만 레이 같은 예술가도 비슷한 작업을 남겼는데, 그는 여기에 ‘레이요그래피’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잘린 크라우스의 말대로 “포토그램은 모든 사진에 적용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거나 명확하게 한다. 모든 사진은 빛의 반사에 의해 감광면 위로 이동된 물리적 자국의 결과다.”
로버트 카파,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 1936.
스투디움과 푼크툼
우리는 사진의 의미를 독해할 수가 있다. 가령 흑인 장교가 프랑스의 삼색기에 경례를 하는 사진이 있다고 하자. 거기서 우리는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즉 ‘조국 프랑스는 피부 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프랑스군의 장교로 받아들인다. 삼색기는 우리 모두의 조국이며, 그 아래서 피부색이 다른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국민이다.’ 이때 그 사진은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표현이 된다.
만 레이, 레이요그래피 ‘키스’, 1935.
가끔 어떤 사진을 볼 때, 그 모든 의미의 해석에 앞서 이른바 ‘필이 꽂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의 병사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포착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생각해보라. 이런 강렬한 체험을 일으키는 것은 그 사진의 의미를 읽게 해주는 ‘일반적’ 해석의 틀이 아니라 그 사진의 ‘개별적’ 존재가 찌르는 고유한 효과다. 이는 곧 사진이 우리 신체에 남긴 ‘자국’이라 할 수 있다. 이 촉각적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부른다. 사진의 진정한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