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막국수.
여름이면 나는 한동안 메밀국수에 ‘미쳐’ 지낸다. 더위에 지친 위장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음식으로 메밀국수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냉면, 막국수, 소바 가리지 않고 메밀국수면 다 좋다. 그러나 제대로 된 메밀국수를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메밀의 약간 까칠한 촉감과 아릿한 향을 최대한 살려낸 개운한 육수! 즉, 면과 육수의 조화가 메밀국수 맛의 포인트다.
내 입을 만족시키는 메밀국숫집은 냉면으로는 서울 충무로의 ‘필동면옥’(02-2266-2611), 영주 풍기의 ‘서부냉면’(054-636-2457), 막국수로는 강원 고성의 ‘백촌막국수’(033-632-5422), 소바로는 아쉽게도 없다. 종로1가에 ‘겐조앙’이라는 최고의 소바집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문을 닫았다. 막국수는 봉평 ‘진미식당’이 한때 참 맛있었는데, 몇 년 사이 면발이 달라지고 육수도 달아져 아쉬움이 크다.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과 의정부 ‘평양면옥’은 필동면옥 집안사람들이 운영한다는데 내 입에는 필동면옥보다 못하다.
내가 메밀국수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소바를 먹어본 뒤부터다. 처음엔 짜면서도 톡 쏘는 시원한 장국 맛으로 소바를 먹었다. 그러다 어느 해 일본에 출장을 갔는데, 100여 년 된 소바집에서 제대로 된 일본식 소바를 맛보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장국에 면 끝만 살짝 적셔서 먹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장국 맛은 보조 역할만 하고 면 맛이 중요해진다. 면발이 너무 딱딱해 내 입에는 맞지 않았지만, 메밀국수 맛의 포인트로 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냉면이건 막국수건 소바건 면 맛에 관심을 두고 먹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메밀국수에서는 싸구려 밀가루 냄새가 났다. 그리고 메밀국수의 면이 대부분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밀은 거의 들어가지 않고 색깔만 그럴듯하게 낸 것들이었다.
그래서 ‘진짜 면’을 찾아나섰다. 메밀이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에 따른 맛 차이, 저장 기간에 따른 맛 차이, 껍질을 깐 메밀과 그렇지 않은 메밀의 배합 비율에 따른 맛 차이, 밀가루 비율에 따른 맛 차이, 면 뽑는 당일 날씨에 따른 맛 차이 등 메밀국수 맛을 내는 데 수많은 변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면을 뽑기 전 메밀 자체의 맛은 또 어떤지 생으로 먹어보기도 하고 가루를 내 더운 물에 타 먹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싱겁게도 이 세상에 똑같은 메밀국수 맛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그때그때의 메밀국수를 즐길 뿐. 앞에서 추천한 메밀국숫집들은 적어도 면 맛을 살리는 데 웬만한 경지에 이르렀고, 그 면 맛을 잃지 않으려면 육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는 곳들이다.
내가 소바를 먹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면만 입 안에 넣어 맛을 본다. 그 다음 장국 맛을 따로 본다. 면이 충분히 맛있으면 무, 파, 고추냉이는 넣지 않은 채 장국에 면을 아래 절반 정도만 적셔 먹는다. 생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는 가짜라면? 무, 파, 고추냉이를 있는 대로 넣고 훌훌 말아 한두 입에 먹어치운다.
냉면 먹는 방법도 있는데, 먼저 육수가 닿지 않은 면을 두어 가닥만 집어 입 안에 넣고 꼭꼭 씹은 뒤 육수를 한입 들이켠다. 육수와 면의 바탕 맛을 알아두기 위함이다. 그러고 난 다음 입 안에 넣을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넣고는 양 볼이 터지도록 씹는다. 오래 씹을수록 맛의 깊이가 더해가는 게 냉면의 매력이다. 물론 겨자와 식초 등을 넣지 않는 게 더 낫다.
막국수는? 막국수는 양념이 너무 많다. ‘막’이라는 말 때문에 마구 섞어 먹어야 제 맛이 날 듯하지만, 경험으로 비춰볼 때 김·깨·참기름 등은 최대한 적게 넣는 것이 면과 육수 맛을 살리는 방법이다.
며칠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평양관’이라는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 본토는 아니지만 제대로 된 평양냉면 맛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밍밍한 닭 육수와 미끄덩한 면발에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평양에서 제대로 된 메밀국수 맛을 볼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