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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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벼락 때문에 한국 영화 망칠라

투자자들, 스크린 채우기 위해 다작 요구 … 시설·전문인력 부족, 흥행 부담 ‘이중고’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6-28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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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벼락 때문에 한국 영화 망칠라

    올해는 15년만에 가장 많은 한국영화가 만들어질 예정이지만, 스크린쿼터 축소와 이질적인 성격의 외부 자본 유입 등 영화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위기에 처했다’는 문구를 들고 시위한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

    얼마 전 한 영화 시사회가 끝난 뒤 몇몇 영화담당 기자들과 영화평론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쓴 입맛을 다셨다.

    “저런 정도의 시나리오에 수십 억원을 쏟아붓다니, 제작자는 돈도 많네.”

    “기획이 졸속으로 이뤄지니 영화가 이렇죠. 문제는 한두 편이 아니라는 겁니다.”

    “매번 판에 박은 신인 감독들의 소감을 들어주는 것도 못할 일이네요.”

    “영화판이 미쳐 돌아간다잖아요.”



    요즘 한국 영화, 외형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고, 제작비도 넘쳐난다고 한다. 예전엔 단독 주연이 될 수 없었던 배우들도 ‘전작에서 조연을 맡아 관객 몇 백만 명을 동원했다’는 말로 주연 데뷔작 펀딩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결과로 나온 한국 영화들은 흥행에서도, 비평에서도 결코 ‘성공적’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외형

    2006년에 들어와 5월 말까지 한국 영화 41편이 개봉했는데, 관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5%가 줄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올해보다 훨씬 적은 29편이 개봉한 점과 ‘왕의 남자’가 올해 5월 말까지 전체 한국 영화 관객 수의 약 40%를 차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머지 한국 영화들의 성적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올해 정부는 “한국 영화 점유율이 59%에 이르니 문제없다”며 7월1일부터 스크린쿼터를 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5월 ‘미션임파서블 3’과 ‘다빈치 코드’ 단 두 편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한국 영화 점유율은 33%로 내려앉았고, 월드컵이 열린 6월의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올해 초 ‘왕의 남자’가 한국 영화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하고, 올해 한국 영화 제작 예상 편수가 90편(2005년 72편)에 이를 것으로 알려지자,‘한국 영화 바람이 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왔다. 스크린쿼터 축소에도 끄떡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금 한국 영화 제작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기획은 연초 90편에서 더 늘어나 100여 편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남양주촬영소(흔히 ‘양수리 세트장’이라고 한다)는 지난해 말에 벌써 1년 예약이 끝났을 정도다. 촬영소 김유형 과장은 “예년엔 2~3개월 전에 예약하면 됐는데, 올해는 11월까지 6개 스튜디오가 꽉 찼다”고 말한다.

    주요 영화제작사인 싸이더스FNH 측은 “‘뚝방전설’ 등 2편의 영화는 세트장이 없어 CF 세트장과 사설 세트장에서 찍었다. 이들은 양수리보다 훨씬 비싸서 제작비 부담이 늘어났다”고 전했다. 세트장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카메라, 조명, 오디오 등 모든 제작 파트가 마찬가지다. 한 카메라 스태프는 “CF 제작사에서 빌려오기도 하지만 촬영 스케줄에 못 맞추면 메인 카메라 한 대로 찍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영화 제작 편수가 늘어난 것은 영화 제작에 투입된 돈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영화 제작에 들어온 돈은 대규모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CJ(CGV)와 오리온(메가박스), 롯데쇼핑(롯데시네마) 등 대재벌의 투자액과 벤처투자조합에서 운영하는 영상펀드 250억원, KT와 SKT가 영화사 인수를 통해 투입한 500억원, 지난해 붐을 이룬 영화사들의 우회 상장에 따라 조성된 최소 1000억원대 각종 펀드 등을 합쳐 4000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2000년 처음 조성됐던 영상펀드가 2005년에 만기를 맞으면서 영화계의 ‘돈가뭄’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스크린 수 늘리기로 무한경쟁에 나선 대기업과 DMB 실용화로 콘텐츠 확보에 혈안이 된 통신사, 그리고 상장한 영화사들이 제작 편수를 늘림으로써 한국 영화계가 ‘돈벼락을 맞았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돈벼락 때문에 한국 영화 망칠라

    2006년의 블록버스터로 영화인들의 기대를 모으는 ‘괴물’. 흥행 성적에 따라 한국 영화의 제작 방향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영화사들의 M&A가 얼마나 무리하게 이뤄졌던지, 영화 두 편 찍은 영세 영화사에도 15억~16억원대를 보장하는 합병 제의가 들어오곤 했다”고 말한다.

    충무로에 대기업이 진출해 자본이 투입된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동안 다양한 성격의 뭉칫돈이 한국 영화 제작에 투입됐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영화계로 새로 들어오는 돈의 특징은 ‘무조건 많은 편수를 찍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1500개 가까운 스크린을 채워야 하고, DMB 채널에도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장한 영화사들은 주가를 유지하기 위해 ‘매출’을 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빈껍데기 상장사가 영화사와의 M&A를 통해 1년 동안 전국 100만 명 동원 영화 5편을 만들었다면, 금세 200억원대 매출 회사가 된다. 순익이 없거나 손해를 봤더라도 회사 규모는 커지므로, 주연배우가 아무리 많은 개런티를 요구해도 지불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M&A로 상장했거나 대기업에 인수된 영화사들은 대부분 지난해보다 2배 정도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영화사들이 갑자기 영화 제작 편수를 두 배로 늘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제작시설과 인력이 부족해질 것이다. 세트장이나 촬영장비는 CF 등 다른 업계에서 빌려온다고 해도 감독,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와 촬영, 조명기사 등 전문인력까지 몽땅 빌려올 수는 없다.

    인력 발굴과 실습 기회는 많아져

    영화계가 신인 감독을 선호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올해는 특히 제작 편수의 절대적 증가 덕분에 신인 ‘입봉의 해’라고 할 정도다. 1~5월에 개봉된 41편 중 감독 데뷔작이 25편, 신인 감독의 2번째와 3번째 작품이 6편에 달했다. 나머지도 신인들의 공동 연출작이거나 외국 감독의 작품들이어서, 현재 개봉 중인 한국 영화 대부분이 감독들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촬영기사나 조명기사로 입봉하는 기술 스태프도 많이 늘고 있다. 싸이더스FNH의 신경호 부장은 “촬영과 조명에서 ‘퍼스트’하던 사람이 ‘기사’로 많이 입봉한다. 그러다 보니 현장을 직접 받쳐줄 수 있는 경험 많은 ‘허리’ 인력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싱글즈’를 쓴 시나리오 작가 노혜영 씨는 “요즘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작가 소개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특이한 건 영화사에서 신인 작가를 선호한다는 점이에요. 제작 속도를 높이고 작가료는 줄이기 위해 검증된 책이나 만화, 연극을 신인에게 맡겨 초고를 만들게 하고, 기성 작가에게 윤색만 맡기는 것이 일반화된 듯해요.”

    영화계에 소리 없이 ‘일류(日流)’가 불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제작 편수는 늘어난 데 반해 소재와 시나리오는 빈곤해, 일본 만화와 드라마 등을 원작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면 시나리오 가격이나 스태프 처우에 변화가 있을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한 촬영 스태프는 “제작비는 느는데 흥행은 안 되는 형편을 다 아니까 제작사에 인건비를 올려달라고 말하기 어렵다. 대신 스케줄을 잘 짜서 1편 일하던 걸 2, 3편 동시에 한다”고 말했다.

    영화사에 소속된 프로듀서들도 전에 비해 업무량이 늘고 흥행에 대한 부담감도 커졌다고 한다. ‘비열한 거리’의 최선중 PD는 “위기감을 느낀다. 관객 수는 정해져 있는데, 한두 편 흥행이 될 뿐 나머지는 전멸이다. 중간급 흥행이란 게 사라졌다”고 했다.

    돈벼락 때문에 한국 영화 망칠라

    대기업들이 스크린 수 우위 확보 경쟁에 나서 제작과 배급까지 겸하면서 영화사들이 대기업에 종속되는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커리지필름의 최용기 대표는 “60편 제작되던 시절에는 투자자가 나름대로 옥석을 구분했지만, 100편을 만드는 상황에선 이런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 전에 문제가 있어 유보됐던 작품들이 갑자기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정된 영화 제작 인력이 쪼개져 영화를 만들면 품질 저하는 필연적이고, 그 결과는 수익률 저하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영화계에서는 IMF 이후 대기업들이 철수하면서 영화 편수가 한 해 50편 미만으로 줄고, 대신 프리 프로덕션이 철저해지면서 대부분의 영화가 중간급 흥행 성적을 거두었던 것을 현 상황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다 ‘쉬리’가 터졌고, 최초로 영상펀드가 다수 생겨나면서 부실한 기획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삼성영상사업단 출신으로 투자, 제작, 매니지먼트사를 겸한 영화사 노비스를 세운 노종윤 대표는 “예전 대기업 자본이 콘텐츠에서 승부를 보려 했다면, 지금 극장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유통사업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위험 부담이 있는 콘텐츠를 만들 이유가 없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부분 관계자들은 한국 영화 제작 붐을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신인 감독과 경험이 짧은 스태프가 대거 참여하면 영화의 질이 떨어질 위험이 커지는 만큼 새 인력이 발굴되고 실습 기회가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투자자가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편수만 채워주길 바라는 입장이라는 점을 활용(?)해 실험과 도전이 이뤄지기도 한다. 출연료가 비싼 스타 대신 연기력을 갖춘 배우를 기용하고 스타일이 강한 감독에게 연출을 맡김으로써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참신한 영화가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투자자이면서 기획자였던 삼성, 대우 같은 대기업이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상업영화들을 만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는 편수 채우기용의 ‘부수효과’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해서 올해 ‘사랑을 놓치다’ ‘온 더 로드 투’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모두들, 괜찮아요’ ‘가족의 탄생’ ‘구타유발자들’처럼 흥행은 저조해도 의미 있는 한국 영화들이 나올 수 있었고, ‘달콤 살벌한 연인’이나 ‘짝패’처럼 뜻밖의 흥행작이 나와 영화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만든 MK버팔로의 심보경 이사는 “올해 상반기에 나온 작품만으로 제작 상황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엔 무리다. 한국 영화의 수익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관객을 찾아나가는 계기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극장 수입에 75% 의존 ‘허약 체질’

    한국 영화계는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등 새로운 흥행 신화가 만들어질 때마다 돈벼락을 맞았고, 이는 마구잡이식 기획을 낳았다. 그 결과 대부분 후속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관객과 외부 자본이 급속히 빠져나가는 일을 겪었다. 영화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 숙련된 영화 인력이 영화계를 떠나고, 이때 영화 제작의 경험과 노하우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공황 상태가 발생한다.

    한 영화인은 “지난해 말 영화계에 돈이 쏟아져 들어올 때 또 ‘빙하기’가 왔음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이긴 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영화의 흥행 타율은 높으면서도 한 편의 흥행에 영화계 전체의 운명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 영화가 극장 흥행 수입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 한 편 벌어 한 편 수지타산 맞추기에 바쁜 ‘하루살이’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 미국 영화의 경우 극장 흥행수입이 전체 수입의 35%에 불과하며, DVD와 방송저작권 등 다양한 수익구조로 영화사들이 흥행 실패의 충격을 완화하고 자체 자본을 축적해왔다. 반면 한국 영화는 극장 수입이 75%에 달해 개봉 첫 주에 성공하지 못하면 대중의 평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제작자와 투자자, 감독 등이 모두 함께 망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극장과 배급사의 힘은 비대해지는 반면 영화사는 극장의 하청회사로 전락한다. 영화가 드물게 한탕에 성공했다고 해도 외부 자본이 판돈을 쓸어 떠나버리면 영화계에는 남는 것이 없다.

    심보경 이사 등은 “그동안 경험으로 볼 때 빠져나갔던 돈은 금세 돌아오지만, 실망한 관객을 다시 극장에 오게 만드는 데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최선중 PD는 “예전에 ‘X맨’ 같은 할리우드 영화는 한국 영화에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미션 임파서블3’의 탄력을 받아서인지 한국 영화 관객을 빼앗아간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영화산업의 허약한 체질이 바뀌지 않으면 돈이 한국 영화를 망치는 역설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산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이기 때문이다. 전에 없이 많은 한국 영화를 만들면서도 근심을 숨기기 못하는 영화제작자들은 하반기의 블록버스터 ‘괴물’과 ‘한반도’가 편수 채우기에 매달리고 있는 한국 영화에 하나의 탈출구가 돼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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