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대지-봄’. 안성하, ‘담배’. 고영훈, ‘이것은 돌입니다 7594’.(왼쪽 부터)
극사실회화로 분류되는 일련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이번 전시는 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계가 형상회화를 중심으로 변모해온 몇 가지 장면들을 제시한다. 이 장면은 크게 70년대의 극사실회화, 80년대의 민중미술, 90년대 이후의 형상회화로 나뉜다.
고영훈의 돌과 이종구의 밭과 안성하의 담배꽁초는 각 시대의 정황에 맡게 각각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아무래도 고영훈의 돌 그림, ‘이것은 돌입니다 7594’일 것이다. 이는 70년대 한국 현대미술계의 ‘백색의 폭압’을 정면 돌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화면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하나를 그려넣은 이 작품은 풍경화나 인물화, 미니멀한 추상회화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 화단에서 하나의 도발이었다.
80년 전후의 김재홍과 이종구는 사실적인 회화 방법에 선명한 이슈를 가미한 경우다. 이들은 역사나 생태 등의 가치 정향을 가지고 사실적인 회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조형 방법으로서의 사실주의를 태도로서의 사실주의로 전환했다.
90년대 이후의 젊은 작가들은 대체로 내러티브를 극소화한 대신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사물의 이미지만을 전달하고자 한다. 어떤 작가들에게서는 이러한 사물의 이미지가 장식적인 차원으로까지 발달함으로써 예술 작품과 상품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서사의 빈곤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일었다. 현대인의 초상, 살점들, 과일과 숲, 입술들, 유리병, 담배꽁초나 사탕, 머리카락 등을 그린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대상을 그리면서도 그 대상들로부터 이탈해 있다.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개인의 내면이나 시대정신, 예술가적 세계 인식 등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기획자가 제시한 이 전시의 논점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 회화는 왜 형상을 고집하는가?’다. 여기에 한 가지 보태고 싶은 논점이 있다. ‘뉴미디어의 시대, 예술가는 왜 회화를 놓지 못하는가?’ ‘화가가 회화를 하는 건지’ 아니면 ‘회화가 화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인지’ 그 자체가 헷갈리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 7월16일까지, 02-2124-8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