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가 자신을 찾아온 고객을 위해 책장에서 불법 소프트웨어를 감추어둔 책을 꺼내든다. 그 책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자신들의 영화에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준 프랑스 사상가에게 보내는 워쇼스키 형제의 오마주이리라. 3월6일 보드리야르가 서거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1980~90년대 세계를 풍미했던 ‘포스트모던’의 담론도 이제 생명력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상념이 들었다.
기호의 정치경제학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소쉬르의 기호학으로 고쳐 쓰려는 시도와 함께 이론적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는 이미 사물이 아니라 기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고, 고전적 정치경제학으로는 더는 현대적 생산과 소비를 설명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강남에서는 물건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당연히 수요-공급과 가격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 설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비쌀수록 잘 팔리는 것은, 그럴수록 신분의 ‘차이’를 더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어서 이미 오래전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지적한 현상이기도 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100년 전에는 미국 상류층의 소비행태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모든 대중의 소비행태가 된 것뿐이랄까?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사용가치’라는 상품의 물리적 속성보다는 ‘기호가치’라는 관념적 속성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오늘날 소비자는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품과 상품의 ‘사이’, 상품과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사이’와 ‘차이’를 소비하는 사회에서는 생산 역시 기호적 특징을 띠게 된다. 사용가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격차가 줄어듦에 따라 기업들은 점점 더 디자인, 브랜드 등을 통해 차이를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사물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던 상품의 경제학은 오늘날 기호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기호의 정치경제학으로 뒤바뀌었다.
실재의 사라짐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과의 ‘차이’로 결정된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물론 소쉬르 기호학이 깔려 있다. 소쉬르는 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다른 낱말들과 만나서 이루는 차이에 있다고 보았다. 낱말의 의미가 ‘차이’에 달려 있다면 낱말의 최종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시니피앙(낱말, 기호)의 무한연쇄에 빠져 좌절하고 말 것이다. 기호는 지시(reference)를 잃고 다른 것들과 차이의 놀이를 벌이며 자전하게 된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말은 기호가 최종적 지시를 잃은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상품의 가치 역시 ‘차이’에 달려 있다면, 사물의 세계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차이의 놀이 속에서 사용가치라는 물리적 속성에 기반을 둔 실재의 견고함은 사라진다. 오늘날 소비는 기호화하고, 상품은 비(非)물질화하고, 생산은 정신화했다. 80년대 들어와 보드리야르는 상품에서 미디어의 이미지로 관심을 전환한다. 이런 전환 속에서도 변함없는 것은 바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차이의 놀이 속에서 실재는 점진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그는 더 급진화한다.
“이라크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1차 이라크전쟁을 두고 보드리야르가 한 말이다. 사담 후세인은 전쟁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병사를 살육의 제물로 바쳤을 뿐이며, 부시는 전쟁을 하지 않고 그저 수백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을 뿐이다. 그리고 세계인들이 본 것은 CNN이 중계하는 전폭기 조종사의 모니터에 비친 영상뿐. 거기서 컴퓨터게임 이상의 실재성을 느끼기란 어렵다. 과거에 이미지는 (예컨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재현했다면, 오늘날 이미지는 현실을 감추고 나아가 사라지게 만든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복제를 가리킨다. 복제는 원본을 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관계가 끊어진 복제를 말한다. 복제 이미지가 원본에서 떨어져나와 자립성을 띠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기술한다. “1. 그것은 심원한 실재의 반영이다. 2. 그것은 심원한 실재를 가린다. 3. 그것은 심원한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4. 그것은 어떤 실재로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존재를 감추고, 그것을 사라지게 하고, 나아가 그것의 자리에 자신을 데려다놓는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그저 현실을 대신하는 이미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플루서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까지 인간은 세계를 ‘주어진 것(datum)’에서 ‘만들어진 것(factum)’으로 바꾸어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가짜로 만든 인공의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와 비슷한 어조로 보드리야르는 ‘모던’의 역사를 세 단계에 걸친 시뮬라크르의 발전과정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한다. 이때 인간들은 가능한 한 실재와 똑같은 복제를 만들려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한다. 산업적 생산은 실재를 생산하되 분업화, 합리화, 기계화 등을 통해 자연적 노동과 별로 닮지 않은 방식으로 스테레오 타입들을 찍어낸다. 세 번째 단계는 정보화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여기서 생산과정은 실재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다. ‘클릭’ 한 번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이 국경을 넘나드는 주식시장을 생각해보라.
시뮬라시옹은 모든 지시가 사라지고, 현실의 자리에 현실의 기호가 들어서는 상황을 가리킨다. 거창한 얘기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가령 게임의 아이템을 사기 위해 현실의 돈을 지불할 때, 0과 1의 배열에 불과한 아이템은 그저 가상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영상들이 이리저리 복제되어 떠돌다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 역시 가상이 곧 현실이 된 예다. 시뮬라시옹은 이렇게 가상 자체가 현실이 되어,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된 상황이다.
복제와 증식
원본 자체가 복제로 이루어지고, 세상 자체가 이미지로 이루어지고, 현실 자체가 가상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 원본과 복제, 세계와 재현,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는 사고는 의미를 잃게 된다. 이로써 ‘근대철학’의 재현모델은 무너진다. 시뮬라크르의 자전 속에서 모든 차이는 소멸한다. 이른바 ‘내파(implosion)’를 통해 역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계급적인 것은 종말을 고한다.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모던은 차이의 생산으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차이의 생산이 극한에 이르면, 차이의 생산이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니라 동일자의 무한증식만을 낳은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가 포스트모던을 묘사하는 데 ‘암세포’와 ‘클론’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무한히 증식하는 스미스의 이미지. 이는 차이의 생산이 더는 새로움을 생산하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악마적 면모를 표현한 것이리라.
미술에서 포스트모던의 예를 찾는다면, 아마 앤디 워홀의 이미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캠벨 수프 깡통, 브릴로 세제 박스, 마릴린 먼로는 끝없이 반복된다. 모든 현대미술에 “무가치하다”는 혹평을 퍼부었던 보드리야르. 유독 워홀만은 높이 평가했는데, 그것은 이 팝아티스트가 자신이 생각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게다. 동일자의 무한증식은 오늘날 우리가 마트의 진열대에서 일상적으로 보는 현상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종언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급진적이다.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버리는 그 과장된 제스처로 그는 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비판은 실천적 보수주의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계급적인 것의 소멸을 선언한 후에 남는 것은, 묵시론적 체념과 더불어 현상(status quo)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응주의뿐. 이 때문에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위장한 보수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곤 한다.
보드리야르는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이미 그는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라는 플라톤주의적 프레임을 여전히-물론 부정적인 형식으로-사용하고 있다. 이미지의 생산은 이제 ‘복제’에서 ‘생성’으로 넘어가고 있다. 21세기에 펼쳐질 세계는 아마 ‘원본과 복제의 관계’라는 플라톤주의보다 ‘생성과 창조’라는 니체주의로 더 잘 설명되지 않을까? 보드리야르는 죽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80~90년대를 풍미했던 포스트모던의 담론도 죽었다.
기호의 정치경제학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소쉬르의 기호학으로 고쳐 쓰려는 시도와 함께 이론적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는 이미 사물이 아니라 기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고, 고전적 정치경제학으로는 더는 현대적 생산과 소비를 설명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강남에서는 물건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당연히 수요-공급과 가격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 설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비쌀수록 잘 팔리는 것은, 그럴수록 신분의 ‘차이’를 더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어서 이미 오래전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지적한 현상이기도 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100년 전에는 미국 상류층의 소비행태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모든 대중의 소비행태가 된 것뿐이랄까?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사용가치’라는 상품의 물리적 속성보다는 ‘기호가치’라는 관념적 속성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오늘날 소비자는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품과 상품의 ‘사이’, 상품과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사이’와 ‘차이’를 소비하는 사회에서는 생산 역시 기호적 특징을 띠게 된다. 사용가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격차가 줄어듦에 따라 기업들은 점점 더 디자인, 브랜드 등을 통해 차이를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사물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던 상품의 경제학은 오늘날 기호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기호의 정치경제학으로 뒤바뀌었다.
실재의 사라짐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과의 ‘차이’로 결정된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물론 소쉬르 기호학이 깔려 있다. 소쉬르는 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다른 낱말들과 만나서 이루는 차이에 있다고 보았다. 낱말의 의미가 ‘차이’에 달려 있다면 낱말의 최종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시니피앙(낱말, 기호)의 무한연쇄에 빠져 좌절하고 말 것이다. 기호는 지시(reference)를 잃고 다른 것들과 차이의 놀이를 벌이며 자전하게 된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말은 기호가 최종적 지시를 잃은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상품의 가치 역시 ‘차이’에 달려 있다면, 사물의 세계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차이의 놀이 속에서 사용가치라는 물리적 속성에 기반을 둔 실재의 견고함은 사라진다. 오늘날 소비는 기호화하고, 상품은 비(非)물질화하고, 생산은 정신화했다. 80년대 들어와 보드리야르는 상품에서 미디어의 이미지로 관심을 전환한다. 이런 전환 속에서도 변함없는 것은 바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차이의 놀이 속에서 실재는 점진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그는 더 급진화한다.
“이라크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1차 이라크전쟁을 두고 보드리야르가 한 말이다. 사담 후세인은 전쟁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병사를 살육의 제물로 바쳤을 뿐이며, 부시는 전쟁을 하지 않고 그저 수백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을 뿐이다. 그리고 세계인들이 본 것은 CNN이 중계하는 전폭기 조종사의 모니터에 비친 영상뿐. 거기서 컴퓨터게임 이상의 실재성을 느끼기란 어렵다. 과거에 이미지는 (예컨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재현했다면, 오늘날 이미지는 현실을 감추고 나아가 사라지게 만든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복제를 가리킨다. 복제는 원본을 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관계가 끊어진 복제를 말한다. 복제 이미지가 원본에서 떨어져나와 자립성을 띠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기술한다. “1. 그것은 심원한 실재의 반영이다. 2. 그것은 심원한 실재를 가린다. 3. 그것은 심원한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4. 그것은 어떤 실재로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존재를 감추고, 그것을 사라지게 하고, 나아가 그것의 자리에 자신을 데려다놓는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그저 현실을 대신하는 이미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플루서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까지 인간은 세계를 ‘주어진 것(datum)’에서 ‘만들어진 것(factum)’으로 바꾸어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가짜로 만든 인공의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와 비슷한 어조로 보드리야르는 ‘모던’의 역사를 세 단계에 걸친 시뮬라크르의 발전과정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한다. 이때 인간들은 가능한 한 실재와 똑같은 복제를 만들려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한다. 산업적 생산은 실재를 생산하되 분업화, 합리화, 기계화 등을 통해 자연적 노동과 별로 닮지 않은 방식으로 스테레오 타입들을 찍어낸다. 세 번째 단계는 정보화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여기서 생산과정은 실재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다. ‘클릭’ 한 번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이 국경을 넘나드는 주식시장을 생각해보라.
시뮬라시옹은 모든 지시가 사라지고, 현실의 자리에 현실의 기호가 들어서는 상황을 가리킨다. 거창한 얘기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가령 게임의 아이템을 사기 위해 현실의 돈을 지불할 때, 0과 1의 배열에 불과한 아이템은 그저 가상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영상들이 이리저리 복제되어 떠돌다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 역시 가상이 곧 현실이 된 예다. 시뮬라시옹은 이렇게 가상 자체가 현실이 되어,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된 상황이다.
복제와 증식
원본 자체가 복제로 이루어지고, 세상 자체가 이미지로 이루어지고, 현실 자체가 가상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 원본과 복제, 세계와 재현,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는 사고는 의미를 잃게 된다. 이로써 ‘근대철학’의 재현모델은 무너진다. 시뮬라크르의 자전 속에서 모든 차이는 소멸한다. 이른바 ‘내파(implosion)’를 통해 역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계급적인 것은 종말을 고한다.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모던은 차이의 생산으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차이의 생산이 극한에 이르면, 차이의 생산이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니라 동일자의 무한증식만을 낳은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가 포스트모던을 묘사하는 데 ‘암세포’와 ‘클론’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무한히 증식하는 스미스의 이미지. 이는 차이의 생산이 더는 새로움을 생산하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악마적 면모를 표현한 것이리라.
미술에서 포스트모던의 예를 찾는다면, 아마 앤디 워홀의 이미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캠벨 수프 깡통, 브릴로 세제 박스, 마릴린 먼로는 끝없이 반복된다. 모든 현대미술에 “무가치하다”는 혹평을 퍼부었던 보드리야르. 유독 워홀만은 높이 평가했는데, 그것은 이 팝아티스트가 자신이 생각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게다. 동일자의 무한증식은 오늘날 우리가 마트의 진열대에서 일상적으로 보는 현상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종언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급진적이다.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버리는 그 과장된 제스처로 그는 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비판은 실천적 보수주의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계급적인 것의 소멸을 선언한 후에 남는 것은, 묵시론적 체념과 더불어 현상(status quo)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응주의뿐. 이 때문에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위장한 보수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곤 한다.
보드리야르는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이미 그는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라는 플라톤주의적 프레임을 여전히-물론 부정적인 형식으로-사용하고 있다. 이미지의 생산은 이제 ‘복제’에서 ‘생성’으로 넘어가고 있다. 21세기에 펼쳐질 세계는 아마 ‘원본과 복제의 관계’라는 플라톤주의보다 ‘생성과 창조’라는 니체주의로 더 잘 설명되지 않을까? 보드리야르는 죽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80~90년대를 풍미했던 포스트모던의 담론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