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 과연 필요한가
5차 3단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의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담은 2·13 합의가 도출되고, 이에 근거해 3월 초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가 열린 뒤 갑작스레 평화협정과 정상회담 가능성을 둘러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는 50여 년간 ‘전쟁을 일시 멈춘’ 휴전 상태로 지내왔으나, 이렇다 할 전투행위가 없어 사실상 종전 상태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나면 정전체제를 유지, 관리해온 유엔사의 해체가 불가피하다. 더욱이 2012년 4월17일이면 한미연합사도 해체되지 않는가.
1953년에 성립된 정전체제가 50여 년 동안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해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은 정전체제 아래서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굳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느냐고 꼬집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정전체제가 제 기능을 다할 때의 얘기다. 5개조 63개 항으로 이뤄진 정전협정은 현재 8개항 2개목 정도만 유효한 상태다. 더욱이 북한은 92년부터 군사정전위원회에 불참하고 있다. 이처럼 정전협정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과연 정전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동서냉전 종식은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 국방부는 미 상원의 ‘넌워너(Nunn-Warner) 수정안’에 따라 90년 4월 ‘동아시아전략구상(EASI)’을 제출했다. 이 보고서엔 한국 등지에서 미 지상군과 일부 공군 병력을 3단계에 걸쳐 감축하고, 한국 방위의 임무를 점차 한국군에 넘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방위의 한국화’ 계획에 따라 91년 3월 한미 두 나라는 유엔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했다. 이는 그동안 북한이 군사정전위 대표가 미군 장성이라는 점을 악용, 한국이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대남 비방 재료로 활용해왔던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시도를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1992년 8월 북한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를 소환함으로써 정전체제를 유명무실화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북한의 출국 요구로 93년 4월 체코 중립국감독위 대표단이 철수한 데 이어 94년 12월엔 중국 군사정전위 대표단, 95년 2월엔 폴란드 중립국감독위 대표단이 한반도에서 떠났다. 정전체제의 여러 축이 무너진 것이다.
그 뒤 북한은 1994년 4월 ‘새로운 평화보장체제’를 내세우며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94년 5월에는 군사정전위 공산 측 대표부 대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함으로써 정전체제의 무력화 시도를 가속화했다. 북한은 96년 4월 ‘정전협정 준수 임무포기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無力化) 시도와 4자회담
한미 두 나라도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 시도에 대해 대책을 세웠다. ‘유엔사-북한군 간 장성급회담’과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 그것이다.
1996년 4월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동 제의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4자회담이 시작됐다. 4자회담 틀 안에는 ‘긴장완화’와 ‘평화체제’라는 이름의 분과위원회가 설치됐다. 4자회담은 99년 8월까지 여섯 차례 본회담이 진행됐으나,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남북 간 교류·협력이 속도를 내면서 남북경협을 위한 인적·물적 교류에 대해 군사적 보장조치가 필요하게 됐다. 그리하여 남북은 2003년 1월27일 장성급회담을 통해 ‘군사보장 잠정합의서’를 채택해 제2항에서 남북관리구역이 비무장지대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승인과 관련된 절차상 문제들은 ‘정전협정’에 따라 협의 처리한다”고 합의했다. 이 합의서는 ‘정전협정’의 유효성을 북한에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북한은 정전체제의 무력화 시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2002년 8월 제14차 회담을 끝으로 ‘유엔사-북한군 간 장성급회담’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2002년 10월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한 직후 미-북 간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주장하더니 2003년 3월부터는 정례적인 군사정전위 참모장교 접촉마저 중단하며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2단계 중동평화 프로세스를 벤치마킹해보면…
평화협정 체결의 교훈을 얻기 위해 중동의 예를 살펴보자. 네 차례에 걸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의 상호방문이 이뤄졌고 미국이 중재에 나서 카터 대통령, 사다트 대통령, 베긴 총리 등 3국 정상이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13일간 장기회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78년 9월 중동평화의 포괄적 틀과 시나이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철군, 국교 정상화를 담은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일종의 신사협정(framework for peace) 또는 잠정협정으로, 완전한 평화협정으로 가기 전 단계 조치다.
이듬해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에 미국은 증인 자격으로 하기서명(postscript)했는데 이 조약은 평화관리기구, 평화지대 설정, 대사관 교환설치 등을 담고 있다. 양국 간의 평화를 가져온 2단계 평화구상을 한반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대신 미국이 조기공중경보기를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전투가 끝난 지 54년이 된 한반도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란 변수로 이집트-이스라엘 간 평화구상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반도엔 잠정협정에 앞서 비핵화 조치를 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게 2006년 11월18일 하노이 한미정상회담에서 나온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제안이다. 그는 이날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처음 이 제안이 나왔을 때만 해도 대다수 전문가들은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하나의 패키지로 간주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6자회담이 재개되고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가 전략적인 것으로 평가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국은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구분, 북한이 초기단계 및 다음 단계 조치를 이행할 경우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 서명식을 갖고자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 구상은 2단계 평화협정의 일부
남-북-미 3자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채택된다면, 이는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문서에 해당한다. 공동선언은 국제법상의 조약, 즉 법적 구속력을 갖는 합의문건은 아니다. (예컨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6·15 공동선언은 그 자체로는 국제법적 효력이 없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도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는 일종의 신사협정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정치적, 도덕적 영향력은 적지 않다).
남-북-미 정상이 만나 종전선언에 서명한다면 이는 분단 역사를 새로 쓰는 분수령이 된다. 남북관계에서 분단국 내부, 곧 ‘민족 내부의 관계’에서 한반도 전쟁 종결에 관해 합의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 법적 구속력 못지않은 ‘정치적, 도덕적 구속력’을 담보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이 ‘선언’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참가국 대표들이 서명하는 등 요식절차를 거친 뒤 그 본문을 교환한 날로부터 효력이 생긴다고 규정해놓으면 ‘조약에 준하는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선언이 정전협정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비핵화가 진전되거나 적어도 평화관리기구, 평화지대 등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2·13 합의가 정한 타임 테이블에 따르면 종전선언이 ‘조약에 준하는 성격’을 갖추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북한이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완료한 상황에서 정전체제를 해소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따라서 핵시설 불능화 단계에서 ‘잠정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되, 그 이전 단계에선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개최해 종전선언 서명식을 갖는 것도 좋은 방안인 듯싶다.
2·13 합의의 비핵화 일정대로 북한이 4월13일까지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완료한 뒤 모든 핵프로그램의 신고를 끝마치고 핵불능화에 착수한다면, 3국 정상이 종전선언에 서명하고 북-미가 연락사무소를 교환 설치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27일이 들어 있는 주(週)가 될 가능성이 높고 장소는 캠프데이비드협정 때처럼 미국이 될 수도 있으나, 판문점이나 북한 지역이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핵불능화까지는 6~12개월이 걸리므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잠정협정은 이르면 올 11월, 늦어도 내년 4~5월까지는 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한국의 신정부가 들어선 직후로 경우에 따라 2차 남-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 1차 3자 정상회담이 한반도에서 열린다면, 두 번째 회담은 부시 대통령이 한국의 새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종전선언에 담긴 함정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그전 혹은 후에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종전선언을 위한 1차회담에서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2차 핵실험 유예’를 약속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도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에 의한 대북 위협·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서면약속을 해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시나리오는 북한이 초기단계와 중간단계의 이행조치를 완료한다는 ‘가정’에 따른 것으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젝트의 포기와 북한이 이미 확보한 플루토늄탄의 해결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북한이 원하는 북-미 수교는 완전한 북핵 해결이 가능할 때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선군통치와 함께 김정일 정권을 지탱하는 양대 기둥이다. 핵무기를 포기하면 선군통치도 흔들린다. 따라서 선군통치의 수혜자인 군부가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려면 북한군부라는 또 다른 ‘난관’을 넘어야 한다.
북한이 종전선언과 잠정협정, 연락사무소 교환설치 수준에서 군부의 압력으로 주저앉으면 미국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대(對)파키스탄 정책처럼 비확산에만 초점을 맞춘 채 플루토늄탄은 그냥 인정할지, 아니면 핵 철폐를 관철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종전선언과 잠정협정이 이뤄진 뒤에도 북한이 유엔사 해체를 요구하고, 한국 국방부의 ‘국방개혁 2020’을 파기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평화협정 체결 때까지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고 있다면, 남북 대화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 간 협상이 되므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한반도발(發) 급변사태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김정일 체제가 붕괴해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 없지 않았다. 북한이 핵 의혹을 일소하고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면 북한발(發) 급변사태가 아니라 한반도발 급변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동북아 정세를 통째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가 이뤄지면 명실상부하게 동북아의 냉전구조는 해체된다. 그때까지 초보적인 형태나마 다자간 안보협력체제가 형성되지 못하면 동북아 질서재편 과정에서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될 위험성도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남북이 상호 적대감을 해소하지 못해 화해가 이뤄지지 못하면 남북한은 두 개의 국가로서 영구 분단될 가능성마저 있다. 남북 간에 전쟁위험은 줄어들게 되지만 통일의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북-미 관계의 진전은 우리에겐 천재일우다. 그러나 기회는 위기이기도 하다. 예상되는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을 만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공존의 제도화와 통일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정치권은 벌써부터 대선이 치러지는 12월로 달려가고 있다. 비핵화, 남북대화, 정상회담, 평화협정 등도 대선에서의 유불리로 판단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커다란 파도가 한반도로 밀려온다. 그런데 남북은 쪽배를 나눠 타고 있다. 남북이 한 배에 올라탈 수 있을까?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5차 3단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의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담은 2·13 합의가 도출되고, 이에 근거해 3월 초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가 열린 뒤 갑작스레 평화협정과 정상회담 가능성을 둘러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는 50여 년간 ‘전쟁을 일시 멈춘’ 휴전 상태로 지내왔으나, 이렇다 할 전투행위가 없어 사실상 종전 상태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나면 정전체제를 유지, 관리해온 유엔사의 해체가 불가피하다. 더욱이 2012년 4월17일이면 한미연합사도 해체되지 않는가.
1953년에 성립된 정전체제가 50여 년 동안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해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은 정전체제 아래서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굳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느냐고 꼬집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정전체제가 제 기능을 다할 때의 얘기다. 5개조 63개 항으로 이뤄진 정전협정은 현재 8개항 2개목 정도만 유효한 상태다. 더욱이 북한은 92년부터 군사정전위원회에 불참하고 있다. 이처럼 정전협정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과연 정전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1953년 7월27일 밤 10시 김일성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왼쪽)이 평양 내각청사에서 정전협정에 최종 서명하고 있다.
‘한국 방위의 한국화’ 계획에 따라 91년 3월 한미 두 나라는 유엔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했다. 이는 그동안 북한이 군사정전위 대표가 미군 장성이라는 점을 악용, 한국이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대남 비방 재료로 활용해왔던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시도를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1992년 8월 북한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를 소환함으로써 정전체제를 유명무실화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북한의 출국 요구로 93년 4월 체코 중립국감독위 대표단이 철수한 데 이어 94년 12월엔 중국 군사정전위 대표단, 95년 2월엔 폴란드 중립국감독위 대표단이 한반도에서 떠났다. 정전체제의 여러 축이 무너진 것이다.
그 뒤 북한은 1994년 4월 ‘새로운 평화보장체제’를 내세우며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94년 5월에는 군사정전위 공산 측 대표부 대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함으로써 정전체제의 무력화 시도를 가속화했다. 북한은 96년 4월 ‘정전협정 준수 임무포기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無力化) 시도와 4자회담
한미 두 나라도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 시도에 대해 대책을 세웠다. ‘유엔사-북한군 간 장성급회담’과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 그것이다.
1996년 4월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동 제의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4자회담이 시작됐다. 4자회담 틀 안에는 ‘긴장완화’와 ‘평화체제’라는 이름의 분과위원회가 설치됐다. 4자회담은 99년 8월까지 여섯 차례 본회담이 진행됐으나,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남북 간 교류·협력이 속도를 내면서 남북경협을 위한 인적·물적 교류에 대해 군사적 보장조치가 필요하게 됐다. 그리하여 남북은 2003년 1월27일 장성급회담을 통해 ‘군사보장 잠정합의서’를 채택해 제2항에서 남북관리구역이 비무장지대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승인과 관련된 절차상 문제들은 ‘정전협정’에 따라 협의 처리한다”고 합의했다. 이 합의서는 ‘정전협정’의 유효성을 북한에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북한은 정전체제의 무력화 시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2002년 8월 제14차 회담을 끝으로 ‘유엔사-북한군 간 장성급회담’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2002년 10월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한 직후 미-북 간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주장하더니 2003년 3월부터는 정례적인 군사정전위 참모장교 접촉마저 중단하며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2단계 중동평화 프로세스를 벤치마킹해보면…
평화협정 체결의 교훈을 얻기 위해 중동의 예를 살펴보자. 네 차례에 걸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의 상호방문이 이뤄졌고 미국이 중재에 나서 카터 대통령, 사다트 대통령, 베긴 총리 등 3국 정상이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13일간 장기회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78년 9월 중동평화의 포괄적 틀과 시나이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철군, 국교 정상화를 담은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일종의 신사협정(framework for peace) 또는 잠정협정으로, 완전한 평화협정으로 가기 전 단계 조치다.
이듬해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에 미국은 증인 자격으로 하기서명(postscript)했는데 이 조약은 평화관리기구, 평화지대 설정, 대사관 교환설치 등을 담고 있다. 양국 간의 평화를 가져온 2단계 평화구상을 한반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대신 미국이 조기공중경보기를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전투가 끝난 지 54년이 된 한반도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란 변수로 이집트-이스라엘 간 평화구상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반도엔 잠정협정에 앞서 비핵화 조치를 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게 2006년 11월18일 하노이 한미정상회담에서 나온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제안이다. 그는 이날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처음 이 제안이 나왔을 때만 해도 대다수 전문가들은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하나의 패키지로 간주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6자회담이 재개되고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가 전략적인 것으로 평가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국은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구분, 북한이 초기단계 및 다음 단계 조치를 이행할 경우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 서명식을 갖고자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 구상은 2단계 평화협정의 일부
남-북-미 3자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채택된다면, 이는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문서에 해당한다. 공동선언은 국제법상의 조약, 즉 법적 구속력을 갖는 합의문건은 아니다. (예컨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6·15 공동선언은 그 자체로는 국제법적 효력이 없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도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는 일종의 신사협정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정치적, 도덕적 영향력은 적지 않다).
남-북-미 정상이 만나 종전선언에 서명한다면 이는 분단 역사를 새로 쓰는 분수령이 된다. 남북관계에서 분단국 내부, 곧 ‘민족 내부의 관계’에서 한반도 전쟁 종결에 관해 합의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 법적 구속력 못지않은 ‘정치적, 도덕적 구속력’을 담보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이 ‘선언’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참가국 대표들이 서명하는 등 요식절차를 거친 뒤 그 본문을 교환한 날로부터 효력이 생긴다고 규정해놓으면 ‘조약에 준하는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선언이 정전협정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비핵화가 진전되거나 적어도 평화관리기구, 평화지대 등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2·13 합의가 정한 타임 테이블에 따르면 종전선언이 ‘조약에 준하는 성격’을 갖추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북한이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완료한 상황에서 정전체제를 해소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따라서 핵시설 불능화 단계에서 ‘잠정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되, 그 이전 단계에선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개최해 종전선언 서명식을 갖는 것도 좋은 방안인 듯싶다.
2·13 합의의 비핵화 일정대로 북한이 4월13일까지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완료한 뒤 모든 핵프로그램의 신고를 끝마치고 핵불능화에 착수한다면, 3국 정상이 종전선언에 서명하고 북-미가 연락사무소를 교환 설치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27일이 들어 있는 주(週)가 될 가능성이 높고 장소는 캠프데이비드협정 때처럼 미국이 될 수도 있으나, 판문점이나 북한 지역이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핵불능화까지는 6~12개월이 걸리므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잠정협정은 이르면 올 11월, 늦어도 내년 4~5월까지는 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한국의 신정부가 들어선 직후로 경우에 따라 2차 남-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 1차 3자 정상회담이 한반도에서 열린다면, 두 번째 회담은 부시 대통령이 한국의 새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종전선언에 담긴 함정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그전 혹은 후에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종전선언을 위한 1차회담에서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2차 핵실험 유예’를 약속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도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에 의한 대북 위협·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서면약속을 해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시나리오는 북한이 초기단계와 중간단계의 이행조치를 완료한다는 ‘가정’에 따른 것으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젝트의 포기와 북한이 이미 확보한 플루토늄탄의 해결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북한이 원하는 북-미 수교는 완전한 북핵 해결이 가능할 때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선군통치와 함께 김정일 정권을 지탱하는 양대 기둥이다. 핵무기를 포기하면 선군통치도 흔들린다. 따라서 선군통치의 수혜자인 군부가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려면 북한군부라는 또 다른 ‘난관’을 넘어야 한다.
북한이 종전선언과 잠정협정, 연락사무소 교환설치 수준에서 군부의 압력으로 주저앉으면 미국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대(對)파키스탄 정책처럼 비확산에만 초점을 맞춘 채 플루토늄탄은 그냥 인정할지, 아니면 핵 철폐를 관철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종전선언과 잠정협정이 이뤄진 뒤에도 북한이 유엔사 해체를 요구하고, 한국 국방부의 ‘국방개혁 2020’을 파기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평화협정 체결 때까지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고 있다면, 남북 대화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 간 협상이 되므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한반도발(發) 급변사태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김정일 체제가 붕괴해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 없지 않았다. 북한이 핵 의혹을 일소하고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면 북한발(發) 급변사태가 아니라 한반도발 급변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동북아 정세를 통째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가 이뤄지면 명실상부하게 동북아의 냉전구조는 해체된다. 그때까지 초보적인 형태나마 다자간 안보협력체제가 형성되지 못하면 동북아 질서재편 과정에서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될 위험성도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남북이 상호 적대감을 해소하지 못해 화해가 이뤄지지 못하면 남북한은 두 개의 국가로서 영구 분단될 가능성마저 있다. 남북 간에 전쟁위험은 줄어들게 되지만 통일의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북-미 관계의 진전은 우리에겐 천재일우다. 그러나 기회는 위기이기도 하다. 예상되는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을 만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공존의 제도화와 통일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정치권은 벌써부터 대선이 치러지는 12월로 달려가고 있다. 비핵화, 남북대화, 정상회담, 평화협정 등도 대선에서의 유불리로 판단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커다란 파도가 한반도로 밀려온다. 그런데 남북은 쪽배를 나눠 타고 있다. 남북이 한 배에 올라탈 수 있을까?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