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1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흉상 제막식에서 만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맨 오른쪽)과 정몽준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
현대중공업 측의 움직임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쪽은 현대그룹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정몽준 의원이 형수가 이끄는 회사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드러낸 데 이어 현대건설마저 인수함으로써 현대가(家)의 적통까지 계승하려는 욕심을 보인 것”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측은 “현대상선 지분 인수도 시장 친화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듯 현대건설 임원 영입도 비즈니스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영입 인사들, 현직 임원들에 영향력 행사 가능
현대건설은 범현대가(家) 그룹의 모태다.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을 기반으로 현대·기아차그룹의 주력인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그룹의 중심인 현대중공업 같은 세계적 기업을 일궜다.
현대건설은 5월15일 현재 현대상선 지분 8.69%를 갖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 의원은 아버지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현대상선은 현대아산 지분 37%를 비롯해 현대증권 13%, 현대택배 30% 등을 가진 현대그룹의 실질적인 지주회사. 현재 현대그룹 측의 현대상선 지분은 현대엘리베이터(17.16%), 케이프포춘(10%), 현정은 회장 등 특수관계인(3.69%), 우리사주(3.89%) 등 총 34.74%다. 반면 현대중공업그룹 측은 현대중공업그룹(26.68%), KCC(6.26%) 등 총 32.94%로, 양측의 지분율 차이는 미미한 수준이다. 6월14, 15일 이뤄지는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양측이 모두 참여하면 지분율 차이는 최대 6%까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현대건설이 현대중공업 쪽에 넘어가면 상황은 단숨에 역전된다.
현대중공업이 영입한 현대건설 전직 임원은 이춘림 전 회장, 김광명 전 사장 등을 비롯해 7~8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춘림 전 회장은 1977년 현대건설 사장으로 승진한 이후 현대중공업 사장, 현대중공업 회장, 현대종합상사 회장 등을 역임한 원로 경영인. 김광명 전 사장은 62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93~98년 사장을 역임했다. 현대건설 재직 시 주로 해외영업을 담당했다. 현대중공업 측이 밝히는 이들의 영입 이유는 해양사업 및 플랜트사업 강화 차원.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조선 부문은 세계 1위의 조선업체로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해양사업 및 플랜트사업 부문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게 사실”이라면서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는 두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문가를 영입했다”고 설명했다. “현대건설 인수 문제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해양·플랜트 사업 강화 위한 것일 뿐”
정 의원이 현대건설 전직 임원 영입을 위해 직접 나섰다는 얘기도 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플랜트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정 의원의 자문에 이 전 회장이 ‘전문가를 영입해 플랜트사업 수주 이후 관리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답했고, 정 의원의 지시에 따라 이 전 회장이 현대건설 전직 임원들을 영입했다”고 말했다.
김광명 전 현대건설 사장
이춘림 전 현대건설 사장
현대건설 임직원들은 ‘누가 새 주인이 되든 상관없다’는 분위기. 현대건설 관계자는 “현대그룹 측이나 현대중공업 측 모두 현대건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양쪽 모두 건설회사가 없기 때문에 인수 이후 ‘점령군’으로 들어와 부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일괄 사표를 쓰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긴 하지만 ‘현대중공업 측이 선수를 쳤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현대건설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현대중공업 측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대목이 있기 때문. 현대건설의 또 다른 관계자는 “플랜트사업 강화 차원에서 영입했다지만 건축 담당 임원까지 5월 초부터 현대중공업으로 출근하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측은 현대상선 지분 매입은 여전히 투자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반면 현대그룹 측은 “단순 투자 목적이라면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현대그룹과 한마디 상의 없이 선뜻 주식을 매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면서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현대상선 경영권을 지켜내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양측의 경영권 분쟁은 현대건설 매각 문제가 마무리될 때까지 장기화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