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강서구 염창동 당사로 들어서는 박근혜 대표.
박 대표는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가급적 언론과 국민 앞에 나서지 않을 계획이다. ‘얼굴 없는 박근혜’로 살겠다는 의도인데, 한 측근은 “일찍 핀 꽃은 일찍 진다”는 말로 그 배경을 설명한다. 전당대회에 임하는 입장도 비슷하다. 한나라당은 7월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를 뽑는다. 여기에서 선출되는 대표는 대선 레이스를 관리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 성향에 따라 레이스의 향배는 달라진다. 자기 사람이 당대표직을 맡게 되면 그만큼 레이스는 유리해진다. 당으로 돌아올 예정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목을 빼고 전당대회를 지켜보는 이유다.
그러나 박 대표 측은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다. 측근이 당권을 잡을 경우 1년 가까이 남은 경선까지 여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릴 위험이 있다. 지방선거를 통해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한 마당에 당권까지 욕심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행위라는 지적에 공감한다. 전당대회에서 손을 떼는 대신 중립적 인사가 당대표에 오를 수 있도록 측면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박 대표 주변에서는 강재섭, 박희태 의원의 이름이 거론된다.
6월16일 전후 대표직 사퇴 예정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박 대표가 호흡 조절에 들어간 것과 달리 측근들은 바쁘게 움직인다. 측근들은 박 대표가 쉬는 동안 정치 외곽을 돌며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요즘 한창 특보단을 보강하고 있다.
박 대표 측은 새로운 ‘박풍(朴風)’도 준비 중이다. 지금과 전혀 다른 새로운 콘텐츠가 장착될 것이라는 게 한 측근의 귀띔이다. 8월에는 여의도나 강북 한 곳에 선거캠프 사무실을 열 계획이다.
측근들은 박 대표의 대선 레이스를 지원할 파트너에 대해서도 집중적인 검토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총재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의 확고부동한 파트너십 구축 및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서진정책의 구체화가 바로 박 대표 측이 관심을 기울이는 두 마리 산토끼.
박 대표는 그중 보수세력과의 고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확실하게 형성됐다고 자평한다. 한 측근은 “이번 선거를 통해 보수세력은 어느 대선 후보보다 박 대표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측근들은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자리잡으려면 아직 2%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박 대표 측은 이 전 총재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고 본다.
두 번에 걸쳐 대선에서 패한 이 전 총재 주변에는 한국 보수의 중심세력이 둥지를 틀고 있다. 서울 남대문로 이 전 총재의 사무실(단암빌딩)에는 요즘도 보수의 주류들이 드나든다. 이 전 총재는 이들과 현실정치에 대해 자주 토론한다. 이 전 총재는 최근 단암빌딩을 찾은 사람들에게 “비(非)좌파가 연합해 좌파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이 전 총재는 최근 박 대표 주도로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한 측근의 설명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4년 8월12일 오전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다. <br>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2004년 9월21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이회창 전 총재의 자택을 찾아가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아래).
지도력과 신뢰도서 부족한 ‘2% 채우기’
좀처럼 현실 정치인을 거론하지 않는 평소 스타일을 감안할 때 박 대표에 대한 이 전 총재의 평가는 이례적이다.
박 대표 측은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과 동정 정서만으로는 대선고지를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늘 새로운 날개를 달기 위해 좌고우면(左顧右眄)한다. 이 전 총재가 보수라는 날개를 선물할 정치 원로라면, DJ는 ‘호남’이란 날개를 달아줄 서(西)쪽의 귀인이다. 박 대표 측은 이 전 총재 못지않게 DJ와 호남을 끌어안아야 대선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박 대표는 DJ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다.
박 대표는 6월15일 광주 방문을 계획 중이다. 이날 광주에서는 광주시와 김대중도서관이 공동주최하는 ‘광주정상회의’가 열린다. 6·15 선언 6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DJ를 비롯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이 행사에 참석, 예를 갖출 계획이다. 서진정책의 일환인 셈이다.
박 대표는 올 들어서만 벌써 여섯 차례나 호남을 방문, 대화를 시도했다. 한나라당이 발간한 ‘대국민약속 실천백서’에는 박 대표가 2004년
3월 대표 취임 이후 16회 이상 호남을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회를 방문한 영남과 비슷한 실적이다.
2004년 한나라당이 ‘지역화합특위’를 구성한 것도 박 대표가 추진한 서진정책 가운데 하나다. 지역화합특위 소속 위원들은 전남 하의도의 김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 ‘DJ 재평가’에 나서기도 했다. 그 직후 DJ 측은 박 대표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2005년 8월 박 대표는 DJ를 만나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며 역사적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동교동의 눈길도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햇볕정책을 정착시킨 DJ는 지금도 사석에서 동서화합에 대한 열망을 내비친다고 한다. DJ는 “동(東·영남)으로부터 핍박받은 자신이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직접 나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방선거를 치르는 동안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 연합 및 합당론’이 제기됐다. DJ와 호남세력, 박근혜와 영남세력이 규합해 거대 정치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이 연대론에는 항상 지역갈등 해소라는 대의명분이 따라붙는다.
박 대표는 휴지기를 통해 동서화합의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동교동과의 접촉을 강화할 계획이다. 박 대표가 이 전 총재와 DJ의 지원을 얻어낸다면 다른 대선주자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아 보인다. 대선주자로 나서려는 박 대표는 아직도 몇 개의 검증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이 전 총재와 DJ가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줄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