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수프.
드디어 방송 시작. 진행자는 나와 인사를 나누고 곧장 맛 칼럼니스트라는 내 직함에 대한 질문을 했다. “맛 칼럼니스트니까 음식은 공짜로 드시겠네요?” 엉겁결에 나는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순간 머리가 핑 돌았고, 이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기분이 상했다.
맛 칼럼니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지가 10년 가까이 된다. 활동 초기만 하더라도 음식 전문 필자는 네댓 명밖에 없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필자까지 포함하면 수십 명에 달할 것이다. 그들 중 공짜로 음식 먹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아는 필자들 중에는 없다. 간혹 음식점에서 매체를 섭외해 홍보 기사를 써달라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전에 내게도 이런 취재 의뢰가 간혹 있었다. 한두 번 하고는 아니다 싶어서 안 한 지 오래다).
묵과 시원한 국물의 환상적 배합 … 신김치·김으로 맛 첨가
음식 전문 필자들이 공짜로 밥을 먹으리라는 생각은 그 라디오 진행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혹시 문화평론 등을 하는 이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는지 되묻고 싶다. “영화, 공짜로 보십니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공짜로 받겠네요”….
음식 전문 필자가 공짜로 밥을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돼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체에 실리는 음식점 관련 글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라서가 아닌가 싶다. 식당 주인과 음식 전문 필자 간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지 않나 하는…. 그러나 모든 필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시라. 그날 라디오 진행자는 정치 칼럼도 곧잘 쓰는 모양인데, 지지 정당으로부터 뭔가 대접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나는 믿는다.
사람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 나는 아침 외 두 끼는 거의 외식을 한다. 대부분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다. 그들을 만날 때 나는 가능한 한 취재 대상이 될 만한 음식점을 고른다. 한 번 간 집은 아주 맛있는 집이 아닌 한 다시 가지 않는다. 그리고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이거다’ 싶으면 일단 사진부터 찍는다. 주인, 종업원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취재를 하는데, 그들은 그저 나를 말 많은 손님 정도로 알지 자신들이 취재당하는 줄도 모른다. ‘주간동아’에 연재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음식점 하나는 취재해둬야 한다. 사실 이런 작업은 상상 밖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다. 돈벌이도 안 되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재미나서’다.
나이 탓인지 작은 일에도 삐쳐 푸념이 많다. 각설하고, 묵밥 맛있게 하는 음식점이나 소개하고자 한다.
묵밥은 묵을 채썰어 시원한 국물을 붓고 신김치, 김, 오이 따위를 올려 먹는 음식이다. 묵은 보통 메밀묵이나 도토리묵을 쓴다. 광화문 교보빌딩 뒤 ‘미진’의 메밀묵은 오랜 전통에도 어쩐지 ‘신세대 느낌’이 강하다. 입에서 힘없이 흩어지는 메밀묵 때문에 식감이 떨어진다는 사람도 있으나 메밀 함량이 높으면 원래 그렇게 힘이 없다.
정릉 아리랑고개 인근에 있는 ‘봉화묵집’은 ‘미진’보다 전통은 짧지만 오히려 전통스런 맛을 내는 집이다. 묵은 도토리묵을 쓴다. 매끌매끌한 묵의 식감은 좋으나 국물을 조금만 넣어 시원하게 들이켜는 맛은 없다. 두 집 다 내 입에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서울에서 먹자면 그래도 이 두 집이 가장 낫다.
라디오 방송에서 겪은 일 때문에 푸념을 하다가 문득 묵밥이 먹고 싶어진 것은 왜일까. ‘묵사발’이 연상된 탓일까? 속 푸는 데 이만한 음식이 없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