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갓 돌아온 5월 초부터 우리 집 전화기가 바빠졌다. 내게 한국과 토고의 경기를 관전할 좌석표를 구해달라는 문의가 문단의 선배와 친척들로부터 쇄도했다. 맙소사! 나도 표를 못 구했는데. 미안하지만 나도 표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어이가 없어 혼자 웃곤 했다. 축구에 대해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한일월드컵 공식보고서의 편집자문위원으로 잠깐 회의에 참석했을 뿐인데, 내가 뭐 축구협회 간부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독일월드컵이 바싹 며칠 뒤로 다가온 요즈음엔 한국팀의 예상 성적을 묻는 언론과 지인들의 전화를 심심찮게 받는다. 지난 주말에도 주간동아의 Y 편집장으로부터 원고청탁과 더불어 질문이 쏟아졌다. 어떨 것 같아요? 뭐가요? 16강 갈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그리고 조심스레 결과를 예측해보며 “힘들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나를 축구전문가로 인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가 족집게 도사가 아닌 바에야 어찌 시원한 대답이 나오겠는가. 다만 나는 지난 4년간 ‘월드사커’를 열독하고 축구에 나를 바쳤던 열정적인 시간들로부터 터득한 약간의 지식과 통찰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경기는 해봐야 알지요. 하지만, 잘해야 16강이고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네요. 한국 선수들은 해외 나가서 일주일만 지나면 체력이 바닥난다던데, 전지훈련과 평가전 일정이 너무 빡빡해요. 스코틀랜드에서 노르웨이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가나와 경기를 치른 뒤에 쾰른으로 날아가야 하지요. 유럽 내 구간이라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무지 피곤할 텐데.
내 계산이 맞는다면 한국 선수들은 5월26일 서울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평가전을 마치고 다음 날 유럽으로 출국해 토고와의 본선 첫 경기를 앞두고 약 2주 동안 다섯 번 비행기를 탄다.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이 모두 바보가 아니고서야 왜 그렇게 무리한 일정을 짰는지? 피로가 누적되면 몸의 균형감각이 깨져 부상이 잦은 법이다. 초보적인 운동상식을 대표팀의 감독이 모른단 말인가? 축구협회의 임원들 가운데 문제의 심각성을 미리 알아차리고 지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단 말인가. 정말 이상하다.
스코틀랜드의 프로팀을 맡았던 아드보카트에게는 글래스고가 낯설지 않아 좋겠지만, 선수들에게는 시끄러운 도심에 위치한 호텔 투숙이 체력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지성, 김남일, 이을용 등 한국팀의 허리를 잇는 주요 선수들의 부상 소식을 전해듣고 나는 나의 선견지명이 맞았음을 대견해하면서, 동시에 피를 나누는 동포로서 걱정이 뒤따랐다. 16강은커녕 1승도 어렵지 않을까? 4강 신화를 잠시 접고 냉정히 따져보자. 우리 선수들은 외국 땅에서 열린 역대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지금 당장 광고주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벌려는 언론이 부추기는 대로 부풀어 오른 ‘아시아의 자존심’은 16강을 뛰어넘어 무한 질주를 꿈꾸지만, 한국이 1라운드만 통과해도 최영미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내일(6월2일) 새벽에 생중계되는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을 놓치지 않으려 ‘KBS 채널7, 1시45분’이라고 적은 종이를 글 쓰는 바로 내 옆에 시선이 미치는 곳에 두었지만, 사실 한국팀의 성적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월드컵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는, 미치기 위해서이다. 세잔의 위대한 격언처럼 ‘그 순간에 그것이 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잠시 물리치기 위해, 지금까지 내 앞에 나타났던 모든 이미지들을 지우기 위해, 씁쓸한 기억들을 지우고 미래에 나를 열광시킬 이미지를 얻기 위해,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나는 그날을 기다린다. 축구와 축구선수들에 대한 나의 끝없는 호기심, 그건 차라리 욕망이었다.
내게 축구는 둥근 공을 통해 세계의 어디로든 가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자유이며, 스크린을 넘어 광막한 우주를 사유할 수 있는 감각적이며 지적인 욕망이다. 축구라는 순간의 마약에 중독되어 본 사람은 다음 문장을 이해하리라. ‘같은 골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경기는 다 다르다’.
지난 4년간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중요한 국제경기를 다 보았다. 챔피언스리그 같은 수준 높은 경기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위성으로 재방송될 때마다 텔레비전 앞에 앉으려 외출을 삼갔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때가 되면 귀가를 서둘렀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알면 알수록 정열이 깊어지듯이, 만일 당신이 축구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같은 게임을 여러 번 보아도 결코 질리지 않는 법이다. 볼 때마다 나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찾아내어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축구는 인종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 느낌과 생각들을 표현하는 인류 공통의 언어이다. 골을 넣고 환호하는 선수들의 표정과 몸짓을 유심히 비교-관찰하며 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골을 터뜨려) 기쁨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골을 허용한)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과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축구를 배우고 즐기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사람과 공만 있으면, 변두리의 뒷골목이나 심지어 실내에서도 약간의 공간만 있으면 공을 찰 수 있다. 골프가 유산계급의 대표적인 운동이라면, 축구는 노동계급문화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국가대표팀의 스타일은 그 나라의 사회와 문화를 대변한다. 브라질 축구는 독일이나 한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발전했다. 브라질 선수들 특유의 볼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뛰어난 운동신경 그리고 자유로운 몸놀림은 한국처럼 이중적이며 폐쇄적인 사회에서는-겉은 최첨단이나 속은 틀에 박힌 봉건적 가치가 지배적인 요상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나오기 힘들다. 끈끈한 조직력이 최대 강점인 독일축구를 보노라면 나는 개인보다 집단을 지향하는 게르만의 민족성과 나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축구는 11명 대 11명이 맞서는 경기이다. 따라서 독일은 항상 이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선수는 선수대로 관객은 관객대로 최고의 경기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어야만 한다.
장편소설을 쓰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나는 월드컵을 준비해왔다. 20인치 평면사각 텔레비전을 새로 사고 안테나를 고쳤다. 한국경기를 시청한 뒤에 독일문화원의 홈페이지에 관전평을 올린다는 약속을 지키려 드디어 집에 인터넷을 설치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차가운 맥주와 냉면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그러다 며칠 전에 사고로 혀를 다쳤다. 시 낭송을 마친 뒤 학생들과 어울려 두부김치에 얹힌 돼지고기를 맹렬히 씹다가 혀를 깨물었다. 콩알만큼 혓바닥의 중간이 잘려 피를 흘린, 1년이 멀다고 내게 일어나는 이상한 사고의 하나였다. 의사의 협박처럼 한 달 뒤에도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마취 주삿바늘을 꽂고 수술을 해야 한다. 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는 나의 야무진 꿈은 물 건너갔지만, 전반전이 끝나고 물냉면을 만들어 먹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아픈 부위를 건드릴 식초를 생략해야겠지만.
축제가 끝날 즈음 나는 알게 되리라. 승리는 무엇이며 패배는 무엇인지, 승복할 수 없는 패배를 어떻게 인정해야 하는지. 운동장의 푸른 잔디 너머 무언가를 보고 깨닫는다면, 그래서 내가 더 성숙해진다면 나는 행복하리라. 행복감에 도취해 통증을 잊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독일월드컵이 바싹 며칠 뒤로 다가온 요즈음엔 한국팀의 예상 성적을 묻는 언론과 지인들의 전화를 심심찮게 받는다. 지난 주말에도 주간동아의 Y 편집장으로부터 원고청탁과 더불어 질문이 쏟아졌다. 어떨 것 같아요? 뭐가요? 16강 갈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그리고 조심스레 결과를 예측해보며 “힘들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나를 축구전문가로 인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가 족집게 도사가 아닌 바에야 어찌 시원한 대답이 나오겠는가. 다만 나는 지난 4년간 ‘월드사커’를 열독하고 축구에 나를 바쳤던 열정적인 시간들로부터 터득한 약간의 지식과 통찰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경기는 해봐야 알지요. 하지만, 잘해야 16강이고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네요. 한국 선수들은 해외 나가서 일주일만 지나면 체력이 바닥난다던데, 전지훈련과 평가전 일정이 너무 빡빡해요. 스코틀랜드에서 노르웨이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가나와 경기를 치른 뒤에 쾰른으로 날아가야 하지요. 유럽 내 구간이라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무지 피곤할 텐데.
내 계산이 맞는다면 한국 선수들은 5월26일 서울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평가전을 마치고 다음 날 유럽으로 출국해 토고와의 본선 첫 경기를 앞두고 약 2주 동안 다섯 번 비행기를 탄다.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이 모두 바보가 아니고서야 왜 그렇게 무리한 일정을 짰는지? 피로가 누적되면 몸의 균형감각이 깨져 부상이 잦은 법이다. 초보적인 운동상식을 대표팀의 감독이 모른단 말인가? 축구협회의 임원들 가운데 문제의 심각성을 미리 알아차리고 지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단 말인가. 정말 이상하다.
스코틀랜드의 프로팀을 맡았던 아드보카트에게는 글래스고가 낯설지 않아 좋겠지만, 선수들에게는 시끄러운 도심에 위치한 호텔 투숙이 체력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지성, 김남일, 이을용 등 한국팀의 허리를 잇는 주요 선수들의 부상 소식을 전해듣고 나는 나의 선견지명이 맞았음을 대견해하면서, 동시에 피를 나누는 동포로서 걱정이 뒤따랐다. 16강은커녕 1승도 어렵지 않을까? 4강 신화를 잠시 접고 냉정히 따져보자. 우리 선수들은 외국 땅에서 열린 역대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지금 당장 광고주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벌려는 언론이 부추기는 대로 부풀어 오른 ‘아시아의 자존심’은 16강을 뛰어넘어 무한 질주를 꿈꾸지만, 한국이 1라운드만 통과해도 최영미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내일(6월2일) 새벽에 생중계되는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을 놓치지 않으려 ‘KBS 채널7, 1시45분’이라고 적은 종이를 글 쓰는 바로 내 옆에 시선이 미치는 곳에 두었지만, 사실 한국팀의 성적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월드컵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는, 미치기 위해서이다. 세잔의 위대한 격언처럼 ‘그 순간에 그것이 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잠시 물리치기 위해, 지금까지 내 앞에 나타났던 모든 이미지들을 지우기 위해, 씁쓸한 기억들을 지우고 미래에 나를 열광시킬 이미지를 얻기 위해,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나는 그날을 기다린다. 축구와 축구선수들에 대한 나의 끝없는 호기심, 그건 차라리 욕망이었다.
내게 축구는 둥근 공을 통해 세계의 어디로든 가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자유이며, 스크린을 넘어 광막한 우주를 사유할 수 있는 감각적이며 지적인 욕망이다. 축구라는 순간의 마약에 중독되어 본 사람은 다음 문장을 이해하리라. ‘같은 골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경기는 다 다르다’.
지난 4년간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중요한 국제경기를 다 보았다. 챔피언스리그 같은 수준 높은 경기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위성으로 재방송될 때마다 텔레비전 앞에 앉으려 외출을 삼갔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때가 되면 귀가를 서둘렀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알면 알수록 정열이 깊어지듯이, 만일 당신이 축구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같은 게임을 여러 번 보아도 결코 질리지 않는 법이다. 볼 때마다 나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찾아내어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축구는 인종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 느낌과 생각들을 표현하는 인류 공통의 언어이다. 골을 넣고 환호하는 선수들의 표정과 몸짓을 유심히 비교-관찰하며 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골을 터뜨려) 기쁨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골을 허용한)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과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축구를 배우고 즐기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사람과 공만 있으면, 변두리의 뒷골목이나 심지어 실내에서도 약간의 공간만 있으면 공을 찰 수 있다. 골프가 유산계급의 대표적인 운동이라면, 축구는 노동계급문화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국가대표팀의 스타일은 그 나라의 사회와 문화를 대변한다. 브라질 축구는 독일이나 한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발전했다. 브라질 선수들 특유의 볼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뛰어난 운동신경 그리고 자유로운 몸놀림은 한국처럼 이중적이며 폐쇄적인 사회에서는-겉은 최첨단이나 속은 틀에 박힌 봉건적 가치가 지배적인 요상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나오기 힘들다. 끈끈한 조직력이 최대 강점인 독일축구를 보노라면 나는 개인보다 집단을 지향하는 게르만의 민족성과 나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축구는 11명 대 11명이 맞서는 경기이다. 따라서 독일은 항상 이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선수는 선수대로 관객은 관객대로 최고의 경기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어야만 한다.
장편소설을 쓰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나는 월드컵을 준비해왔다. 20인치 평면사각 텔레비전을 새로 사고 안테나를 고쳤다. 한국경기를 시청한 뒤에 독일문화원의 홈페이지에 관전평을 올린다는 약속을 지키려 드디어 집에 인터넷을 설치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차가운 맥주와 냉면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그러다 며칠 전에 사고로 혀를 다쳤다. 시 낭송을 마친 뒤 학생들과 어울려 두부김치에 얹힌 돼지고기를 맹렬히 씹다가 혀를 깨물었다. 콩알만큼 혓바닥의 중간이 잘려 피를 흘린, 1년이 멀다고 내게 일어나는 이상한 사고의 하나였다. 의사의 협박처럼 한 달 뒤에도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마취 주삿바늘을 꽂고 수술을 해야 한다. 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는 나의 야무진 꿈은 물 건너갔지만, 전반전이 끝나고 물냉면을 만들어 먹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아픈 부위를 건드릴 식초를 생략해야겠지만.
축제가 끝날 즈음 나는 알게 되리라. 승리는 무엇이며 패배는 무엇인지, 승복할 수 없는 패배를 어떻게 인정해야 하는지. 운동장의 푸른 잔디 너머 무언가를 보고 깨닫는다면, 그래서 내가 더 성숙해진다면 나는 행복하리라. 행복감에 도취해 통증을 잊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나는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