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1일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당사에 마련된 선거상황실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권을 이합집산(離合集散)과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정계개편을 추진할 만한 동력(動力)이 열린우리당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미 지방선거 과정에서 정동영 전 의장이 제기한 ‘민주개혁세력 대연합’을 둘러싸고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영남권 및 개혁당 출신 친노(親盧)인사들을 중심으로 대연합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김두관 최고위원(경남도지사 후보)은 정 전 의장에게 “당을 떠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여기에다 정 전 의장이 선거일 다음 날 의장직을 사퇴하는 등 참패 후폭풍이 거센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이 앞장서서 정계개편을 추진할 힘이나 능력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은 6월1일 김근태 최고위원이 평소 주장해온 ‘평화개혁세력 대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 상황에서 정계개편 문제를 제기하는 건 국민한테 도리가 아니다. 고심할 필요는 있지만 국민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회피하고 모면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뒷날로 미뤄야 한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된다.
정치적 뇌사에 빠진 우리당 살릴 수 있는 외길
노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에 대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의 참모습이 나오는 법이고 국민들은 그 모습을 오래 기억한다. 멀리 보고 준비하며 인내할 줄 아는 지혜와 자세가 필요한 때다”라고 당부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정계개편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처럼 여권 고위인사들이 당장의 정계개편 가능성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다 민주개혁세력 대연합의 핵심인 민주당과의 통합이나 고건 전 국무총리의 영입 또한 현 상황에서는 무망(無望)한 실정이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6월1일 기자회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는 국민을 배신하지 않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신망 있는 대권주자를 적극 영입하겠다”며 노 대통령에게 칼날을 겨눈 뒤 “원적지가 민주당인 사람들은 언제든지 문호를 개방해놓았으니 열린우리당을 스스로 해체하고 민주당으로 돌아오면 받아주겠다”고 말해 정계개편이 이뤄진다면 열린우리당이 아닌 민주당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같이 정계개편의 주체와 객체조차 불분명한 데다 이들의 이해관계 또한 엇갈려 있어 열린우리당의 선거 참패가 즉각적인 정계개편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계개편은 반드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수(常數)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흐름은 추진 동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열린우리당의 지방선거 참패로 이미 시작됐고, 상당 기간 논란과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게 현실적일 듯하다.
정계개편의 첫 뇌관은 바로 정 전 의장이 제기했던 민주개혁세력 대연합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의 통합으로 호남 등 여권의 전통적 지지기반 복원을 노리는 민주개혁세력 대연합은 이른바 ‘서부벨트 구축전략’과 맥을 같이한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연합’으로 승리를 움켜쥐었던 바로 그 전략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표출됐듯이 이 전략에 대해 친노그룹 등 당 일각에서 개혁 정체성 상실과 지역구도 극복 무산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열린우리당의 흐름이 창당 초심 때와는 달리 민주개혁세력 대연합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친노그룹을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의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와 진대제 경기도지사 후보 등 지방선거에서 떨어졌지만 당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을 앞세우거나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 새 인물 영입을 통한 ‘새판 짜기’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다음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계개편 방안은 고 전 총리를 핵심으로 한 ‘헤쳐 모여’다. 고 전 총리의 강점은 탄핵정국 후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2년 가까이 대통령 후보 지지도에서 선두권을 줄곧 지켜왔다는 점이다. 그동안 여권이 앞세워 왔으나 두 자릿수 지지도를 기록한 적이 없는 정동영, 김근태 대통령 후보 카드는 이번 지방선거 참패로 사실상 폐기 절차에 들어갔다고 봐도 좋을 만큼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고 전 총리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의 폭넓은 연대와 통합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려 한다. 7월 중 새로운 정치를 위한 국민운동 성격의 연대모임을 결성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대의 성격에 대해 그는 “정당은 아니다”라고 밝힌 뒤 “특정 정당과의 연대보다는 중도 실용주의 개혁을 같이할 사람은 누구와도 연대하고 협력할 생각”이라고 말해 기존 정당 입당에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
한나라당은 무풍지대로 남을 가능성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정계개편 과정에서 무풍지대일까.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이라는 확실한 투 톱과 함께 손학규 경기도지사라는 예비카드를 가진 한나라당이 정계개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 일각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그동안 승리의 방정식이었던 통합-3당합당(92년 대선), DJP연합(97년 대선),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2002년 대선)-의 원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말이 끊이질 않는다. 즉 야당이면서도 유권자들의 눈에 여당보다 더 ‘여당스럽게’ 비치는 한나라당의 모습을 정계개편을 통해 변모시키지 않고서는 지방선거 압승이 대선 승리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또 다른 아킬레스건은 세 사람, 특히 박 대표와 이 시장의 당내 경선이 제대로 이뤄질까 하는 점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시장이 경선에서 불리하다고 판단할 경우 탈당을 결행해 노 대통령과 손을 잡거나 제3의 후보로 출마하는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한나라당의 유력 후보가 탈당하는 순간 ‘제2의 이인제’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정치역학상 현실성이 매우 낮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현시점에서 한나라당의 관심은 이런 가상현실보다는 대통령 후보 경선을 관리할 당대표를 뽑는 7월 전당대회에 쏠려 있다. 대선 전초전인 이 전당대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누가 당대표가 되느냐에 따라 한나라당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력 대통령 후보의 대리인이 당대표를 차지할지, 중립적 인사를 영입해 당대표로 추대할지 전당대회의 결과가 한나라당을 정계개편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