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테논신전 조각 중 디오니소스로 추정되는 남성상, 기원전 447~432년경, 대리석, 대영박물관.
무엇보다 미술작품에는 시간에 대한 그 시대의 관념이 고스란히 담긴다. ‘현재’를 중시하는 근대의 ‘선적인 시간(linear time)’관념은 서양미술사에서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세기 절정에 이른 그리스의 자연주의 미술에서 우리는 선적인 시간관념을 인상 깊게 만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과 흡사한 형태의 사실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냈다. 인류가 조각상을 만든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고대 그리스 조각의 자연주의적 성취는 비교할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업적이다. 그 성취는 기본적으로 선적인 시간관념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실시간(real time)’ 혹은 ‘이성적인 시간(rational time)’이라고도 불리는 선적인 시간관념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이 의미하듯 현재를 기준으로 한 방향으로 흘러와서 흘러가는 시간관념인 것이다. 이 시간관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하지만, 고대 문명 일반의 수준에서 보자면 새롭고도 낯선 것이었다.
선적인 시간에서는 늘 현재가 중심이다. 과거는 ‘흘러 가버린 현재’일 뿐이다. 이처럼 현재를 중시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새것과 변화를 긍정한다. 그리스 자연주의가 새것과 변화에 대한 긍정 위에 뿌리내렸다는 점은 이 미술이 기원전 7세기부터 200여 년 동안 사실적인 형식으로 점점 더‘진화’한 데서 알 수 있다. 다른 고대 문명의 미술에서는 이런 급격한 진화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파르테논신전 조각상, 고대문명 미술의 급격한 진화 시기에 탄생
기원전 7세기 이전의 그리스 조각도 여느 문명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고정화된 관념적 양식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이 미술은 빠른 자연주의적 발달을 보이게 되며, 이는 비판과 수정의 지속적인 변증법적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완벽한 인체상을 자랑하는 기원전 5세기의 파르테논신전 조각상은 이 과정이 빚은 최고로 아름다운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파르테논의 세기’는 곧 그리스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운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가치와 자연주의, 그리고 선적인 시간은 그만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이전 그리스 사람들의 시간관념은 상당히 회귀적이었다. 이는 신분제에 기초한 귀족 사회 일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민주주의 사회 이전, 그리스의 귀족들은 늘 먼 과거에서 현재의 영광을 찾았다. 그들은 신이나 영웅의 핏줄을 잇고 있는, 범인(凡人)들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화이기 때문에 더욱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폐쇄적인 영역이었다. 기득권은 그렇게 지켜졌다. 그리스의 옛 귀족들은 당연히 과거를 중시했을 뿐 아니라, 현실도 과거 중심적인 시선에서 바라봤다.
이 경우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거나 반복에 불과하며, 결국 모든 현재는 과거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결정론적 사고로 쉽게 이어진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변화와 진보를 용인하지 않는 정체된 시간관념인 것이다. 하지만 파르테논신전의 조각들은 이러한 시간관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드가, ‘뤼도비크 르피크 자작과 그의 딸들(콩코르드광장)’, 1875, 캔버스에 유채, 79x118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와 같은 선적인 시간관념과 대비되는 시간관념을 우리 미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예는 20세기 최고의 한국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중섭이다. 그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워 서양미술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누구보다 한국적 의식과 정서에 충실한 화가였다. 그런 까닭에 그가 그린 서양화들은 서양화임에도 선적인 시간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그림 속의 시간은 한편으로는 회귀적인,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간적인 특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1953년경에 그린 ‘도원’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낙원 같은 풍경에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그림, 그리움과 동경, 팬터지의 집합체다. 특히 어릴 적 누렸던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 따뜻한 기억들에 대한 강렬한 회귀 의식이 엿보인다. 그에게 시간은 그렇게 거꾸로 흘렀고, 마침내는 원초의 자리에서 머물러버렸다. 이중섭의 머물러버린 시간, 곧 무시간성은 ‘어린아이의 무시간성(timelessness of childhood)’에 가깝다.
1953년작 ‘도원’ 어린 시절에 대한 회귀 의식 엿보여
이중섭, ‘도원’, 1953년경, 종이에 유채, 65x76cm.
“생후 18개월까지 아이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사는 듯이 보이며,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일반적으로 ‘지금’이라는 의미가 획득된다. 18개월부터 30개월까지 비록 아이들이 사용하는 시간 관련 단어들이 주로 현재와 관계되어 있지만, 아이들은 조만간 ‘곧’ 같은 미래 관련 단어를 조금씩 습득한다. 그러나 과거에 관한 단어는 거의 습득하지 못한다. … 설령 아이가 시간과 특정 외부 운동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해도 아이가 시간을 진정으로 인식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사물이 서로 관련을 가질 뿐 아니라 아이 자신에게도 관련이 있음을 알 때 비로소 시간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중섭의 그림은 이처럼 시간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는 아이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을 영원한 현재처럼 의식하는 느낌을 준다. 이는 결국 식민지와 6·25전쟁이라는 재난을 통해 근대 서구의 선적인 시간관념이 한반도를 관통하던 당시 바로 그 시간관념이 대표하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처절한 예술적 저항이었을 수 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이렇듯 시간은 공간예술이라 불리는 미술에 나름의 자취를 늘 또렷한 표정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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