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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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부재 트라우마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09-10-07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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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부재 트라우마
    ‘밤으로의 긴 여로’란 ‘과거로의 절망적이고 괴로운 탐색’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족이 아침부터 밤까지 고통스러운 전사(前事)를 곱씹으며 애증관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20세기 초, 미국 동북부 코네티컷주 항구도시의 별장이다.

    장소가 집이 아닌 별장이라는 것이 ‘가정부재 의식’을 느끼게 한다. 유진 오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연극의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한 작가다. 대표작 중 하나인 ‘밤으로의 긴 여로’는 특히 자전적인 성격을 띤다. 실제로 캐릭터들은 오닐의 가족들과 흡사하다.

    이 작품에서 전직 연극배우인 아버지 제임스는 야박할 정도의 구두쇠로 가족에게 제대로 돈을 쓰지 않는다. 때문에 어머니 메어리는 브로드웨이의 싸구려 호텔에서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한 채 엉터리 의사가 준 마약을 투약하게 된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마약에 손대는 것을 보고 충격받은 형 제이미는 배우 생활을 포기하고 술에 찌들어 산다.

    동생 에드먼드는 결핵에 걸려 자칫하면 죽을 판이다. 배경의 전환도 없고 100% 대사로 이끌어가는 작품임에도 특별한 재미가 느껴지는 이유는, 극의 말미까지 계속해서 과거가 폭로되는 구조에 있다. 초반에는 단란해 보이던 가족이 어두워지는 무대와 함께 점점 균열을 내보인다. 갈등이 일어나고 회복되는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손써볼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향해가는 것이다.

    극은 어머니의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보통 과거를 끄집어내서 말하는 것은 트라우마의 ‘치유’ 과정이다. 그러나 이 가족은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확인했음에도 상처가 깊어만 가는 듯 보인다. 이들에게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현재’이며 불 보듯 뻔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번역조의 대사와 이국적인 유머 등이 낯선 느낌을 주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유머가 살아나고 낭송조의 대사는 ‘문학적인 맛’을 낸다. 아버지는 전직 연극배우답게 아들과의 대화 중 자신이 출연한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대사를 읊어댄다. 여기에 대해 에드먼드는 오닐이 실제로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인 쇼펜하우어, 니체, 보들레르 등의 허무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대사로 맞받아친다.

    별장의 하녀인 캐슬린(서은경)은 전형적인 미국 시골처녀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최광일은 독설을 늘어놓지만, 가족 중 가장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제이미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손숙(메어리), 김명수(제임스), 김석훈(에드먼드)이 출연한다. 명동예술극장. 10월11일까지, 문의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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