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봤다. 아나운서들이 나와 생방송 중에 겪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토크 프로그램이었는데, 입사 3년차에서 입사한 지 21년이나 된 부장급 아나운서까지 다양한 연차의 남녀 아나운서가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의 발언을 듣게 됐다.
“우리 부장님은 결혼 안 하셨어요!”
꽤나 의외였다. 뉴스에서도 종종 보던 지긋한 나이의 아나운서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단 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려 말을 꺼낸 젊은 남자 아나운서를 보았다. 그런데 이 아나운서, 난데없이 이렇게 덧붙이는 게 아닌가.
“‘돌싱’이거든요!”
맙소사. 순간 내 귀를 후볐다. 온 국민이 다 보는 방송에 나와서 직장 상사가 이혼남이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담함이라니. 나로 말하면 자유분방한 문단과, 자유롭기로만 따지면 ‘안드로메다급’이라 할 수 있는 패션계에 몸담은 터라 ‘돌싱’은 물론, 돌아왔다 다시 제 짝을 찾아간 사람도 꽤 많이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그맨이 아닌 아나운서가, 그것도 신입이 부장 바로 앞에서 ‘이분, 돌싱이세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이혼’이 예전과는 다른 층위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야흐로 우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해성사를 하는 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 수다를 떨 듯 이혼을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이혼이 별건가. 생각해보면 4년도 못 살고 헤어지는 커플은 의외로 많다. 이런 사실은 통계가 보여주고, 오랜만에 간 동창회가 증명하고, 휴대전화와 문자를 타고 넘어온 친구들의 메시지가 입증한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손예진이 “아, 그거? 한 번 했었어, 예전에”라고 이혼을 에둘러 말하기 이전부터, ‘한 번 갔다 온 분’이라는 말이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통용되곤 했다. 개그맨 김국진이 ‘돌싱’의 아이콘이 되고, 이경실이 재혼한 남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길 웃으며 하는 것도 그런 증거일 것이다.
오래전, 기가 막힐 정도로 연애를 잘하는 한 남자 선배에게 그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의 경우, 회식하던 호프집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나 이른 퇴근길 한가한 지하철 4호선에서 만난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거나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났다. 그는 그리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키가 크지도 않았다. 돈이 많거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주변엔 여자가 끊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 초유의 비법이 대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나로선 연애를 비롯해 도무지 되는 게 하나도 없던 암울한 시절의 이야기다.
“간단해!”
선배는 커피를 마시며 꽤나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남겼다. “여자를 만나려고 열 번쯤 시도하거든. 내가 성공하는 건 그중 한 번이나 두 번뿐이야. 넌 내가 퇴짜 맞는 걸 한 번도 못 본 거지. 좀 싱겁나?”
선배가 피식 웃었다. 싱겁기로 말하면 맹물보다 더 싱거운 소리였다. 사실 비법이랄 것도 없는 그의 성공은 무수한 실패를 담보로 한 것이었다. 문제는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공의 초석으로 삼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하면 된다’라는 말에 뒤따르는 ‘아님 말고!’가 가진 진정한 포기와 자기 인정의 미학을 어떻게 완성시키느냐 하는 것 말이다. 노력만 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 가르치는 이 시대의 긍정적 문화는 이로운 점도 많지만 심각한 부작용도 낳는다. 노력했는데 왜 안 되는 것이냐고 밀어붙이면 결국 실패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남 탓’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헤어지는 법 고민할 시기
또 자신의 실패를 ‘노력 부족’이라 믿는 서글픈 영혼들은 어쩌랴. 타고난 재능 때문에, 운이 없어서, 애초에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실패했을 수많은 가능성을 천천히 되씹어보는 여유를 그런 막가파식 믿음은 쓸어버린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인생엔 정말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결혼의 실패인 이혼 또한 그러한 것이리라. 이쯤 되면 ‘결혼학’이 아닌 ‘이혼학’도 개설해볼 만하다.
사실 잘 만나는 것보다, 잘 헤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혼학’이 있다면 꼭 들어보고 싶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궤변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혼이란 말하자면 인생의 ‘실패’ 목록 중 가히 대표급이라 할 수 있다.
사업 실패, 취직 실패, 이직 실패, 친구와의 불화 등 인생의 여러 실패 중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가장 높이,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이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사실상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이혼의 의미나 그 결과에 대해 알려주는 강의도 없다. 이혼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사람 없듯이 사람들은 대부분 이혼이나 사고를 겪는 끔찍한 일은 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내가 제안하는 ‘이혼학 강의’는 이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난방지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나무로 만든 ‘관’에 누워보는 건, 죽기 위해서가 아닌 더 잘 살기 위한 몸부림이란 걸 너무나 잘 안다.
전신마비 장애를 겪은 대니얼 고틀립 박사가 쓴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한 남자가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걸 이웃이 발견한다. 이웃은 그를 도와 함께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보이지 않자 이웃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열쇠를 본 곳이 어딘가요?”
“현관문 근처요,”
이웃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가로등까지 나와서 찾고 있는 거죠?” 남자는 대답한다.
“여기가 더 밝잖아요!”
고틀립 박사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답을 찾으려고 할 때, 무의식적으로 더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더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심연을,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열쇠를 잃어버린 그 지점으로 스스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때때로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잘 사는 것보단 잘 죽는 것을, 멋지게 만나는 것보다 지혜롭게 헤어지는 법을 천천히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부장님은 결혼 안 하셨어요!”
꽤나 의외였다. 뉴스에서도 종종 보던 지긋한 나이의 아나운서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단 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려 말을 꺼낸 젊은 남자 아나운서를 보았다. 그런데 이 아나운서, 난데없이 이렇게 덧붙이는 게 아닌가.
“‘돌싱’이거든요!”
맙소사. 순간 내 귀를 후볐다. 온 국민이 다 보는 방송에 나와서 직장 상사가 이혼남이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담함이라니. 나로 말하면 자유분방한 문단과, 자유롭기로만 따지면 ‘안드로메다급’이라 할 수 있는 패션계에 몸담은 터라 ‘돌싱’은 물론, 돌아왔다 다시 제 짝을 찾아간 사람도 꽤 많이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그맨이 아닌 아나운서가, 그것도 신입이 부장 바로 앞에서 ‘이분, 돌싱이세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이혼’이 예전과는 다른 층위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야흐로 우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해성사를 하는 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 수다를 떨 듯 이혼을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이혼이 별건가. 생각해보면 4년도 못 살고 헤어지는 커플은 의외로 많다. 이런 사실은 통계가 보여주고, 오랜만에 간 동창회가 증명하고, 휴대전화와 문자를 타고 넘어온 친구들의 메시지가 입증한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손예진이 “아, 그거? 한 번 했었어, 예전에”라고 이혼을 에둘러 말하기 이전부터, ‘한 번 갔다 온 분’이라는 말이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통용되곤 했다. 개그맨 김국진이 ‘돌싱’의 아이콘이 되고, 이경실이 재혼한 남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길 웃으며 하는 것도 그런 증거일 것이다.
오래전, 기가 막힐 정도로 연애를 잘하는 한 남자 선배에게 그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의 경우, 회식하던 호프집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나 이른 퇴근길 한가한 지하철 4호선에서 만난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거나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났다. 그는 그리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키가 크지도 않았다. 돈이 많거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주변엔 여자가 끊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 초유의 비법이 대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나로선 연애를 비롯해 도무지 되는 게 하나도 없던 암울한 시절의 이야기다.
“간단해!”
선배는 커피를 마시며 꽤나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남겼다. “여자를 만나려고 열 번쯤 시도하거든. 내가 성공하는 건 그중 한 번이나 두 번뿐이야. 넌 내가 퇴짜 맞는 걸 한 번도 못 본 거지. 좀 싱겁나?”
선배가 피식 웃었다. 싱겁기로 말하면 맹물보다 더 싱거운 소리였다. 사실 비법이랄 것도 없는 그의 성공은 무수한 실패를 담보로 한 것이었다. 문제는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공의 초석으로 삼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하면 된다’라는 말에 뒤따르는 ‘아님 말고!’가 가진 진정한 포기와 자기 인정의 미학을 어떻게 완성시키느냐 하는 것 말이다. 노력만 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 가르치는 이 시대의 긍정적 문화는 이로운 점도 많지만 심각한 부작용도 낳는다. 노력했는데 왜 안 되는 것이냐고 밀어붙이면 결국 실패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남 탓’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헤어지는 법 고민할 시기
또 자신의 실패를 ‘노력 부족’이라 믿는 서글픈 영혼들은 어쩌랴. 타고난 재능 때문에, 운이 없어서, 애초에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실패했을 수많은 가능성을 천천히 되씹어보는 여유를 그런 막가파식 믿음은 쓸어버린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인생엔 정말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결혼의 실패인 이혼 또한 그러한 것이리라. 이쯤 되면 ‘결혼학’이 아닌 ‘이혼학’도 개설해볼 만하다.
사실 잘 만나는 것보다, 잘 헤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혼학’이 있다면 꼭 들어보고 싶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궤변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혼이란 말하자면 인생의 ‘실패’ 목록 중 가히 대표급이라 할 수 있다.
사업 실패, 취직 실패, 이직 실패, 친구와의 불화 등 인생의 여러 실패 중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가장 높이,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이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사실상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이혼의 의미나 그 결과에 대해 알려주는 강의도 없다. 이혼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사람 없듯이 사람들은 대부분 이혼이나 사고를 겪는 끔찍한 일은 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내가 제안하는 ‘이혼학 강의’는 이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난방지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나무로 만든 ‘관’에 누워보는 건, 죽기 위해서가 아닌 더 잘 살기 위한 몸부림이란 걸 너무나 잘 안다.
전신마비 장애를 겪은 대니얼 고틀립 박사가 쓴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한 남자가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걸 이웃이 발견한다. 이웃은 그를 도와 함께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보이지 않자 이웃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열쇠를 본 곳이 어딘가요?”
“현관문 근처요,”
이웃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가로등까지 나와서 찾고 있는 거죠?” 남자는 대답한다.
“여기가 더 밝잖아요!”
고틀립 박사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답을 찾으려고 할 때, 무의식적으로 더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더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심연을,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열쇠를 잃어버린 그 지점으로 스스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때때로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잘 사는 것보단 잘 죽는 것을, 멋지게 만나는 것보다 지혜롭게 헤어지는 법을 천천히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