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3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위원장 자격으로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내각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유신체제의 골자는 10월17일 오후 7시를 기해 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폐지하며 국회를 해산한 뒤 대통령 간선제를 도입하겠다는 것.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한 이 문서들에 따르면, 남측은 10월유신 선포 다음 날인 18일에도 북측과 접촉해 조치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남북이 1971년 8월부터 적십자회담을 해왔고, 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남북 조절위원회를 구성해 대화를 한 사실은 이미 알려졌지만 남한 당국이 10월유신을 북측에 친절하게, 그것도 사전에 설명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동아일보 9월24일자 A1, 4, 5면 참조)
유신 선언 발표 1시간 전에 통보
이 같은 사실은 미국의 국제냉전사 연구 싱크탱크 집단인 우드로윌슨센터가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관해온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입수해 분석함으로써 밝혀졌다. 우드로윌슨센터는 2006년부터 한국의 북한대학원대와 함께 ‘북한 국제문서 조사사업(NKIDP·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entation Project)’을 진행해왔으며, 1971~72년의 북한 관련 문서 39건(총 164쪽)을 입수해 영어로 번역했다.
특히 우드로윌슨센터는 북한 평양에 상주 대사관을 설치했던 옛 공산권 국가들의 외교문서 중 최근 비밀이 해제된 1차 자료를 발굴해 영어로 번역한 뒤, 이를 통해 북한의 정책결정 과정과 배경을 연구하고 있다. 문서들에 따르면, 김재봉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1972년 10월19일 동유럽 6개국 외교관들을 만나 “16일 판문점 남북접촉에서 남측의 박정희 대통령이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고, 17일 (10월유신) 발표 1시간 전에도 남측이 전화를 걸어와 라디오를 주의 깊게 들으라고 알려왔다”고 전했다.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김일성의 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어 (통일을 위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들은 1971년 대화의 물꼬를 튼 남북한이 10월유신을 전후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료(史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박정희 정부가 10월유신을 북측에 미리 통보했다는 사실은 서로 오버랩되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가운데에 있다. 1971년 이후 대화를 해온 남과 북이 단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유신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1975년 1월 지하철 정류장. 유신이념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광고물이 시선을 끈다(좌측사진). 1972년 10월 김성진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유신체제 선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우측사진).
북한대학원대 류길재 교수는 “1970년대 초반 국제 정세에서 북한은 중국을, 남한은 미국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비슷한 처지였다”며 “이에 따라 남북한이 남북대화와 독재 권력의 공고화라는 비슷한 형태로 대응했다는 사실이 문서를 통해 강화됐다”고 말했다.
문서들에 따르면, 이후락 부장은 1972년 10월유신 단행 다음 날인 10월18일 김영주 위원장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아시아의 상황은 1970년대 들어 급격히 변했다. 특히 미-소 양극체제와 미-소-중-일 4강 관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국가적 과제들을 미국이나 일본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수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됐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대화가 시작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대외인식을 드러냈다.
북한도 동유럽을 상대로 대남 평화공세의 원인을 설명하는 가운데 “아시아 국가끼리 싸우게 하고, 남한과 북한끼리 싸우게 해 한반도에서 영구 분단을 획책하는 미국 ‘닉슨 독트린’을 반대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명지대 강규형 교수는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던 당시 김일성, 박정희 정권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남북한 당국은 국제 정치 변화에 따른 남북대화와 통일 논의를 각자 자신의 권력 강화에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이후락 부장은 10월유신 이틀 전인 16일 김영주 위원장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질서’란 대통령이 선거와 야당, 언론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독재 구조임이 드러났다. 북한도 두 달 뒤인 1972년 12월 사실상 새 헌법을 만들어 주석제를 신설, ‘김일성 수령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남북한은 같은 길을 걸었다.
北 최근 유화 공세 본질 파악에 의미
한편 당시 남측이 북측에 10월유신을 사전 고지한 것은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이후락 부장의 행위가 분명한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문서들은 1970년대 남북한 데탕트에 있어서 정치인인 이 부장 개인의 역할을 부각하는 사료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문서 조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북한대학원대 신종대 교수는 “이 부장은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북한을 방문해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으며 10월유신에 대한 북한의 오해로 남북대화가 끊길 것을 우려해 사전에 알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 부장은 스스로 박 대통령 체제의 2인자라고 생각했으며 남북대화라는 업적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키우려 집착했던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문서들에 따르면, 북한은 같은 해 7월4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등 3원칙에 따라 남북통일을 이룬다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동유럽 사회주의 우방국들을 상대로 “한반도에서 미국과 일본을 몰아내 박정희 정권을 고립시키고 내부 혁명역량을 강화해 남북연방제 통일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선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남북대화를 주장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적화를 노렸다는 보수진영의 시각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북한대학원대 선준영 석좌교수(전 유엔대사)는 “최근 북한의 대외 유화공세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자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