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선진화를 추구하는 초선의원 모임에 참석한 정몽준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9월22일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마무리된 직후 친박 진영의 한 의원과 엔빅스팀 멤버들이 여의도의 식당에 모였다. 당연히 화제는 ‘정운찬 청문회’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 후보자로 발탁하자 곧바로 ‘박근혜 대항마’로 뽑혔다는 평가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정 후보자를 그다지 경계할 필요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청문회에서 불거진 백화점식 의혹들도 그렇지만,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계획의 원안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함으로써 그의 고향인 충청권에서 완전히 눈 밖에 난 까닭이다. 대통령선거(이하 대선) 때마다 캐스팅 보트를 쥐는 충청권의 민심이 등을 돌리면 대권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해진다. 정 후보자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청문회에서 “대통령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친박 진영에선 이 같은 발언을 계기로 정 후보자가 대권주자군에서 탈락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좋은 징후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오히려 모처럼 조성된 긴장감이 풀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 전 대표가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경쟁자 없는 독주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자각을 하던 터였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엔빅스팀 모임에서는 또 한 명의 ‘박근혜 대항마’로 꼽히는 정몽준 대표를 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전언이다.
의원들과 잇단 회동, 勢 키우기 열심
모임에 참석한 친박 진영의 한 인사는 “이명박 정부 초기와 달리 지금부터는 박 전 대표가 ‘포스트 MB’ 구도에서 독주할 경우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혼자 맞게 된다”며 “여권 내부나 야권의 공격 목표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정 대표를 도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친박 진영의 또 다른 의원은 좀더 노골적으로 정 대표를 배척해선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어차피 친이(親이명박) 핵심에서도 정 대표를 사석(捨石·바둑에서 버리는 돌)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 초에 있을 조기 전당대회까지만 여당을 이끌어갈 관리형 대표로 생각할 뿐 친이 진영이 내세울 차기 주자로 여기진 않는다. 우리 처지에선 괜히 정 대표와 대립각을 세워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정 대표의 생각과 각오는 다르다. 당 대표를 언제까지 할지 모르지만, 있는 동안에는 자리를 충분히 활용해 자신의 최대 약점인 당내의 세(勢) 부족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겠다는 생각이다. 취임 직후부터 소속 국회의원들을 상임위별, 지역별로 번갈아 만나고, 박 전 대표와 단독 회동을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9월23일 단행한 당직개편을 보면 정 대표의 ‘당 속으로 파고들기’ 전략을 대강 읽을 수 있다. 정 대표는 당내 친이·친박 세력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몇 명 안 되는 인원이지만 자신의 측근들을 전진 배치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대표와 식사권 경품 해프닝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계진 이성헌 의원, 정몽준 대표 측근인 전여옥 신영수 홍정욱 의원(좌측위부터). 친이계로 분류되는 장광근 진수희 권택기 조해진 의원, 심규철 제2사무부총장 (우측위부터).
이들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한나라당 질서의 기본 틀을 깨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특히 사무총장과 부총장들은 10·28 재·보궐선거의 공천 작업을 벌이고 있는 시점이다. 정 대표는 그 대신 중위 당직에는 ‘MJ계’로 분류할 수 있는 측근들을 모두 불러 포진시켰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 대표가 창당한 ‘국민통합 21’에 당무위원으로 참여했던 전여옥 의원은 이명규 의원을 밀어내고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았다. 현대건설 임원을 지낸 신영수 의원은 대외협력본부장, 처조카 사위인 홍정욱 의원은 국제위원장이 됐다. 정 대표와 가까운 의원 중에 당직을 맡지 않은 사람은 울산 동구 지역구를 물려받은 안효대 의원 정도다.
정 대표는 이와 함께 이재오 계열의 권택기 의원을 기획위원장, 친박 진영의 이계진 의원을 홍보기획본부장으로 기용하는 등 친이·친박 진영을 아우르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이번 인사 직전에는 대변인에 MB 직계인 조해진 의원을 임명했다. 조 의원은 이명박 후보 대통령 만들기의 산실이던 ‘안국포럼’ 출신으로, 정 대표가 친이 진영의 소장파를 끌어안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 대표의 친이·친박 포용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해 그에게 대권 고지로 가는 날개를 달아줄지는 미지수다. 정 대표가 아직 차기 주자로서의 확고한 인식을 당내에 심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리더십에 의문을 품는 분위기도 없지 않은 탓이다.
실제로 9·23 당직개편에서 정보위원장에 기용된 이철우 의원은 “정 대표와 함께 국회 정보위원회에 소속된 인연으로 발탁된 것 같다”며 “정 대표 체제에서 정보위원장을 맡았다고 ‘MJ 계보’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 사무처 실무진 사이에서도 정 대표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한 탓에 정권을 놓쳤다는 악감정이 남아 있는 데다, 최근 발생한 ‘대표와의 식사권’ 해프닝으로 일부 사무처 요원들이 불쾌감마저 느끼고 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최근 사무처 요원들과 상견례를 겸한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5명을 추첨해 경품을 나눠줬는데, 경품이 대표와 다시 식사할 수 있는 ‘티켓’이어서 실소(失笑)를 자아냈다. 이런 기류와 더불어 당내 일부 중진급 의원들마저 정 대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9월 초 정 대표가 취임한 이후 공식회의 외에 대표가 참석하는 외부 행사에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고위당직자는 최근 단행한 당직개편의 내용을 보고 정 대표의 용병술에 상당한 실망감을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친이 진영의 공격에 맞서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친박 진영과 차기 전당대회를 앞두고 임시 관리형 대표로 여기는 친이 진영, 그리고 당직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속에서 정 대표는 과연 한나라당 내에서 ‘의미 있는’ 뿌리내리기를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