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번이나 함께 밥을 먹으며 그렇게 눈치를 줬건만 이 곰, 반응이 없었다. “선택받지 말고 선택하는 여성이 돼라”는 교수님 말씀이 떠올라 용기를 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얼음 동동 뜬 사이다 한 잔을 벌컥 들이켠 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연애는 다른 사람이랑 하더라도 결혼만큼은 나랑 해. 결혼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각자 연애하다 결혼 적령기 때 다시 만나자. 괜히 오래 연애하다 깨질 수도 있잖아.”
대학 2학년,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렇게 고백을 쏟아부은 게 부끄러워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뒤. 비행기 도착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아침부터 나와 기다렸다는 그를 보니 ‘귀여운 곰돌이 푸우! 생각 정말 잘했어(^_^)’ 싶었다(‘푸우’는 내가 붙여준 그의 애칭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 이별과 재회를 반복했지만, 지금도 그의 이름만 들으면 배시시 웃음이 번지는 걸 보면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하긴 12년 연애 끝에 결혼한 친언니가 “(9년 연애한) 너희 정도면 한창 뜨거울 때”라고 말했으니 설렘은 당연한 것일 수도.
예단…예물…시부모님과 협상테이블에 앉다
고백의 후유증은 컸다. 그가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날 좋아하지 않으면서 만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따라서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만큼은 반드시 받아야 했다. 수시로 “프러포즈 받아야 상견례한다”고 세뇌를 시켜놓아선지 올 2월 설날, 그는 케이크를 사들고 집에 찾아왔다. 반지는 내 예상과 달리 케이크 안이 아닌 흰 리본으로 묶인 보석상자에 담겨 있었지만, 그런대로 ‘짜고 치는 고스톱’의 재미를 느끼며 결혼을 허했다.
자연스러운 절차로 상견례 날을 보름 뒤로 잡았다. 3월1일, 내 생일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시부모님과 ‘협상’을 해야 했다. 9년째 내 집 드나들듯 하며 ‘이 부모님이 내 친정 부모님인지, 내 친정 부모님이 시부모님인지’ 헷갈릴 정도로 살갑게 지낸 사이이기에 어른 어려운 줄 모르고 용기를 냈다. (예비) 시어머님, 시아버님과 식탁에 마주앉아 협상학 수업 내용을 수십 번 떠올렸다.
“예단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딸만 셋을 둔 저희 부모님은 한 번도 받지 못할 예단을 시부모님께만 드릴 수 없어요. 그 대신 집을 마련하는 데 보태겠습니다. 예단을 받으시겠거든 저희 집에도 예단을 주세요. 저희 쪽에도 인사받을 친척 계십니다.”
“예물은 안 받겠습니다. 워낙 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해주셔도 부담스러워요. 신부한테만 잘해주시면 팔려가는 기분이 듭니다.”
“장손 며느리가 되는 게 겁나요. 장손 며느리치고 안 아픈 사람이 없더라고요. 우리 옆집 아줌마도 그렇고. 1년에 여덟 번 있다는 제사, 야근 잦은 직장에 다니면서 꼬박꼬박 챙길 자신이 없습니다. 휴가를 내서라도 명절과 할아버지 제사는 챙길 테니 나머지는 그렇게 못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시어른들 행사는 할머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일에만 가겠습니다. 시어머님 6남매, 시아버님 6남매, 아빠 7남매, 엄마는 이모가 둘인데 대소사 챙기다 보면 제 일상은 없어집니다.”
“결혼식 주례는 누구보다 저희를 잘 아는 부모님이 해주시면 더 의미 있을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속사포처럼 이어진 나의 ‘요구사항’이었다. 화룡점정 격으로 이어진 마지막 질문.
“아이를 낳게 되면 양육은 어느 정도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정색하며)” 유순한 시부모님의 표정이 바뀌는가 싶더니 침착하신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건 나도 생각했던 거다. 그렇지만 새로 들어온 사람의 흉을 덮어준다는 이불은 꼭 했으면 싶다. 나만 좋은 것 덮을 수 없으니 택선이(예비 남편의 이름)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것도 해드려라. 그리고 혜민이의 할머님들이 다 돌아가셨으니 택선인 혜민이 부모님께 이불 해드리고.”
“예물은 안 해줄 수가 없다. 며느리가 둘도 아니고 딱 너 하나인데 어떻게 안 해주겠니. 반지 하나만은 해줄 테니 받아라. 안 그럼 화낼 거다. 조상님들 생각해서 제사를 줄일 수는 없지만 네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해라. 가족이 많으니 부담 될 거야. 그것도 너희들 편한 대로 하렴. 주례는 나는 못하겠고 아버지들께서 상의해서 하시면 되겠다. 아기를 낳으면 혜민이 어머님이랑 도와줄 거야. 한데 그 얘길 왜 벌써부터 하는 거니?(웃음)”
이렇게나마 대화를 하고 나니 결혼이 겁나질 않았다. 물론 남자친구 집에서 그 뒤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이럴 때는 입 무거운 그의 장점이 반짝반짝 빛난다. 상견례 가는 길에 예쁜 난 사들고 엄마 아빠를 모시러 온 남자친구가 정말이지 믿음직스러웠다. 어른들이 영업시간이 끝나도록 화기애애하게 말씀을 나누다 엄마가 말한 날로 결혼식 날을 정한 뒤부터는 모든 게 평탄했다. 양가 어른이 주례를 서는 일도 긍정적으로 진행됐다.
웨딩 스튜디오의 사진작가와 사진기자 선배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데 ‘꿈은 이루어진다’는 2002 월드컵 문구가 자꾸만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5월. 결혼식장을 잡아야 했다. 주변 어른들과 친구들의 평을 종합해 서너 군데 돌아다니다 한 곳을 택했다. 계약금은 반반 부담했다. 양가 어머니도 결혼식장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만끽하며 흐르는 시간을 즐겼다.
간간이 사람들이 “결혼 준비는 잘 되니?”라고 물을 땐 피식 웃었다. 그때만 해도 결혼 준비가 쉬운 줄 알았다. 결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한 선배 덕분이었다. 선배는 내 결혼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는 예단은 안 하더라도 시어머니 선물은 꼭 해드리라고 강조했다.
특히 핸드백을 사드리면 무척 좋아하신다고 하니 안 할 수가 없었다. 시어머님은 내 ‘제안’에 흔쾌히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고 하셨다. 평소 내가 아는 시어머님이라면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살짝 당황스러웠다. 기왕 선물하는 것, 시어머님께만 사드릴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우리엄마 아닌가.
그리고 기왕 선물을 드리는 거라면 ‘노 세일’ 브랜드를 택해야 했다. 웬만한 브랜드 제품들은 시간이 지나면 세일 시즌 매장이나 아웃렛 매장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니, 언제 사도 손해 보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고르고 싶었다.
그 유명한 C사 매장에서 생애 첫 명품 백을 고르는 양가 어머니는 놀이공원에 간 아이처럼 행복한 모습이었다. 핸드백을 든 채 요리조리 자태를 비춰보는 양가 어머니의 모습에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졌다. 잊고 살았지만 엄마도 여자였다. 문제는 착한 딸, 착한 며느리 놀이하는 건 무척 즐거웠으나 석 달치 월급이 몽땅 사라졌다는 것. ‘푸우’ 역시 나 따라서 양가 어머니의 선물을 사느라 몇 달간 빈털터리 신세였다.
“결혼, 다시 생각하자”
미국의 유명한 아웃렛 타운 ‘우드베리’에 들러 결혼에 필요한 각종 혼수를 구입하기로 했다. 알뜰한 시어머님은 지난해 쓴 영수증 뒷면에 사야 할 제품들을 또박또박 적어놓으셨다. 리스트에는 시계, 코트, 정장, 반지, 속옷 3벌, 화장품이 적혀 있었다.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함께 온 친정식구들은 우드베리 앞 모텔에 머물면서 1박2일 쇼핑이란 걸 해봤다.
시댁 식구들의 선물도 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위해 뭔가를 고른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렇게 예물로 주고받을 물건까지 이틀간의 쇼핑으로 웬만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러곤 한동안 잠잠하게 보냈다. 그런데 결혼을 위해 구입한 물건들을 집 안에 들여놓는 바로 그 시점,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얼른 시집가! 이렇게 어지르지 말고 시집가서 사!” 아빠도 섭섭하신지 괜히 “가져갈 짐은 미리 싸놓아라”며 냉랭하게 말씀하셨다.
<B>1</B> 드레스 고르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는 ‘푸우’와 여동생. <B>2</B> 웨딩 촬영을 위해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 <B>3</B> 청첩장에 속지 붙이려 둘러앉은 아빠, 엄마, 막내 돌이(탁자 위의 강아지). <B>4</B> 주례 준비하느라 턱시도 입어보신 (예비)시아버지.
열흘 뒤 “전셋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니 당장 계약해야 한다”는 시부모님과 “오늘은 (기사) 마감이라 갈 수 없고, 사는 사람이 보지 않은 상황에서 계약할 수 없다”는 나의 의견충돌이 있자 순진한 ‘푸우’가 폭군으로 변신했다.
“내가 이렇게 마련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넌 더치페이 한다면서 작은 것만 하지, 집 문제에선 그렇지도 않잖아! 아픈 우리 엄마가 나가서 계약하시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 그럼 네가 와서 하든가. 넌 하지도 못하면서 왜 요구만 하는 거야!(엉엉)”
남자친구는 내가 자기 부모님을 신뢰하지 못한다고 해서 화가 난 상태였다. 사실 신뢰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닌데…. 어찌됐든 ‘푸우’가 지난 9년간 이만큼 화낸 적이 없던 터라 겁이 나긴 났다. 홧김에 나도 오밤중에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으니…. 다음 날 평화롭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 상처가 아물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입 무거운 남자친구는 5년쯤 흐른 뒤 소주를 한두 병 마셔야 그때 왜 글렇게 화가 났는지 구구절절 말할 것 같다.
물론 50년이 지나야 화가 풀릴 수도 있다. 어찌됐든 내가 본 다른 집을 고르는 것으로 문제는 일단락됐다. 다음은 신혼여행지를 고를 차례였다. 배낭여행 중에 만난 사이라 그런지 여행에 대한 느낌이 각별해 여행만큼은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푸우는 지구본을 돌리다 찾았다는 크로아티아에 가고 싶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이 많이 가는 휴양지라면서 짠돌이인 내게 “가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비용은 여느 신혼여행객들이 쓰는 것보다 20%쯤 적게 든다”며 꼬드겼다.
출장 갈 기회가 적기 때문인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혼여행지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무대를 생각하던 나는 비싼 비행기표 탓에 그 꿈을 고이 접고 남자친구의 의견을 존중했다. 늘 어깃장만 놓던 내가 오랜만에 고개를 쉽게 끄덕여서인지 푸우는 어리둥절해했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며, 펜션을 고르며 한동안 즐거워하는 그를 보자 여행의 참맛은 뭐니 뭐니 해도 준비하는 맛이다 싶었다. 다시 찾아온 평화.
그런데 또다시 문제가 터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청첩장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현대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클래식하고 전통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내가 하나의 청첩장을 선택한다는 게 무리였다. 남자친구는 내가 고른 청첩장을 보고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오빠의 말을 반영해주겠다”는 내 꾐에 넘어가 “솔직히 말해 촌스럽다”고 털어놨다.
난 또 어김없이 화를 냈고 “그렇게 촌스러우면 각자 골라! 오빠는 고르지도 않으면서 왜 평가만 해!”라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청첩장 마감일이 다가오자 이번에도 ‘푸우’가 양보했다.청첩장 문구를 쓰는 데도 두 달은 족히 걸렸다. 마침내 마감일. 글이 오죽 안 써졌으면 라디오에 사연을 다 보냈을까.
평소 즐겨 듣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청첩장 글쓰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연과 함께 동물원의 ‘널 사랑하겠어’를 신청했다. 내 사연은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됐다. 문구와의 사투는 결국 5시간 만에 끝났다. 마침표를 찍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이제는 청첩장을 받으면 그 문구부터 눈여겨보게 될 것 같다.
돌잔치 때 입은 이후 처음으로 한복을 입어봤다.
일본에 사는 이모가 알려준 한복집에서 한복을 맞추는데, 이번에는 엄마의 취향 문제가 불거졌다. 양가 어머니가 세트로 입고 싶어하셨지만 취향이 다르니 한복을 고를 수 없었다. 이번에도 너그러운 시어머님이 양보하셨다. 딸 시집보내는 친정엄마 마음을 잘 안다고 하시면서….
그 뒤로는 틈만 나면 가구단지에 들렀다. 물건 잘 못 고르는 내가 선뜻 나서진 못했다. 냄비도 보러 가고, 가전도 보러 다녔지만 값이 비싸 미뤘다.
그런데 이렇게 이것저것 보러 다니면서도 정작 결혼식의 꽃인 웨딩드레스 고르는 일은 뒷전으로 미뤘다. 평소 허리라인이 ‘완만’해 고민이던 나는 웨딩드레스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체념하고 있었다.
드레스 안에 달린 복대로 배를 가까스로 눌렀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무슨 드레스가 그렇게나 작은지…. 게으른 탓에 결국 예식장에서 드레스를 맞추고, 급기야 2개의 속옷과 한복 속바지를 입고서 억지스러운 S라인을 만들고 나니 조금은 흡족했다.
다행이었다. 까칠한 나를 이해하느라 9년간 서서히 20kg이나 불어난 남자친구에게 어느 날 심각하게 말했다.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을 위해 몸 한번 만들어보자.” 그러나 외침은 선언으로 끝났다.
도리어 강박관념 탓에 폭식하는 습관만 생겼다. 동생이 살 빼는 크림과 롤러를 사다 날랐지만 바르는 것이 겁나 여태껏 사용 한번 해보지 못했다. 9월21일 웨딩 촬영을 위해 메이크업 받던 날.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예식 전까지 피부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가 일러준 방법은 간단했다.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대고 있다 때가 나오도록 살살 문지를 것. 그 후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댔다가 뗀 뒤 수분크림을 평소의 2배로 바를 것. 하루 실천해봤는데 주변 여자 선배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자 빨랫줄에 걸린 낡은 속옷처럼 사는 게 고단하다. 대단한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고르는 일 자체가 힘들다. 웨딩 촬영을 하면서 다른 커플과 똑같은 포즈로 웃음 짓자니 그 피곤함이 더해진다. 시어머님이 보내주신 홍삼액을 마셔도 고3 이후 처음으로 생긴 구강 내 염증은 커져만 간다. 당장 이번 주 토요일에는 미국에서 산 이불을 들고 분당으로, 일죽으로 배달을 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애석해하실 것 같다. 손녀사위에게 이불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이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시어머님은 엄마에게 이불 한 채를 더 해주셨다. 고마운 분이다. 웨딩 촬영을 마쳤다고 하니 먼저 결혼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어제 힘들었지? 결혼식은 더 힘들어. 사는 건 그보다 더 힘들고.” 꼭 한 달 남은 결혼식, 얼른 치르고 싶다. 그래야 그전처럼 평화롭고 나른한 주말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설마 그 주말이 다시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