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에피소드의 한 토막. 권 노인 역의 박인환(왼쪽)과 송 여사 역의 정혜선이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우리에게 ‘인권’은 지켜야 하지만 확인하기엔 불편한 것들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새로 입사한 직장 후배가 채식주의자에 술도 못 마신다. 회식 자리에서 상추 잎만 뜯고, 입사신고 하라고 준 술은 입에만 대고 내려놓는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게다가 입만 열면 바른생활 사나이를 자처한다.
우리는 물론 안다. 그의 ‘선택’과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종종 다수가 정상의 논리를 대신한다. 많은 사람이 육식을 즐기고, 다수의 사람이 술을 마시기 때문에 그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다. 이를테면 ‘인권’이란 이런 소수의 사람에게 ‘소수’라고 곁눈질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이다.
사실 윤리에는 강제력이 없다. 윤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배우지만 실상 배움이 실천되는 경우는 드물다. 다수자 처지에 서는 순간 소수자의 권리는 무시해도 될 만한 것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임 감독의 ‘날아라, 펭귄’은 바로 이 소수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인권영화 ‘다섯 개의 시선’에서 유머러스하지만 날선 비판을 보여줬던 임 감독은 이번에도 소수자에 대한 그만의 시선을 보여준다. 시선은 ‘소수자’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소수자’라고 하면 동성애자, 장애인 등을 기계적으로 떠올린다. 마치 소수자라고 입력하면 자동 출력되는 결과물처럼 말이다.
하지만 임 감독은 소수자라는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예외적이며 선천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게 임 감독의 시선이고, 그의 강점이다. ‘날아라, 펭귄’에서 주시하는 소수자의 면면은 임 감독이 생각하는 정의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첫 부분에는 여러 학원을 다니느라 숨 쉴 틈 없는 초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이는 말문이 트이자마자 영어학원을 다녔지만 영 신통치 않다. 영어학원, 영어마을로 다니는 아이에게 ‘영어’는 스트레스의 다른 이름이다. “태권도 배우던 시절이 언제냐”라고 묻던 극성 엄마는 교포 출신의 사범이 영어로 가르쳐준다는 말에 냉큼 태권도 학원에 아이를 등록시킨다. 자나 깨나 영어, 아이는 창살 없는 감옥에 살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신입사원들을 다룬다. 채식주의자인 남자 신입사원은 사사건건 선배들의 농담과 공격에 시달리고 여직원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때문에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그러니까 남자 신입사원에게는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도 없고 여자 신입사원에게는 담배를 피울 기호도 허락되지 않는다. 미풍양속과 관습이라는 이유로 많은 기준이 강제적으로 전달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앞선 에피소드에서 다수에 속했던 사람들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소수자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부하 직원을 괴롭히던 상사는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오랜만에 한국에 온 아이와 아내에게 찬밥 신세를 당하는 기러기아빠로 그려진다. 레시피를 배워 연마한 떡볶이는 너무 매운 음식으로 홀대받고, 오랜만에 만난 아내는 “당신이 곁에 있으니 잠이 안 와”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는 어느새 돈 벌어다 받치는 현금출납기로 전락해 있다.
다음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가부장적 권위 위에 군림하려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노인대학, 문화센터로 일상의 여가를 촘촘히 쓰는 아내에 비해 할아버지가 하는 일이라고는 심술보따리를 늘어놓아 아내를 괴롭히는 게 전부다. 황혼 이혼으로 이어질 법한 일종의 사건들은 웃음과 버무려져 변화된 현실을 보여준다. 과연 누가 피해자이고 소수자인지 분명치 않지만, 영화를 보고 나올 즘엔 사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소수자이고 한편으로는 가해자임을 알게 된다.
‘날아라, 펭귄’의 힘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인권영화가 우리가 소수자인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했다면, 임 감독은 ‘우리도 소수자이니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살자’라고 소수자들을 보듬는다. 무릇 ‘인권’이란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시작된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