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종이 유배됐던 강원 영월군 청령포. 빠른 물살과 가파른 암벽에 둘러싸인 천연 감옥이다. 뉴스1
단종(1441~1457)의 삶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하다.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의 기대 속에 역대 어느 왕보다 단단한 정통성을 갖고 왕위에 올랐지만 삼촌 수양대군(세조) 일파의 쿠데타로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 비운의 인물이니 말이다.
단종의 죽음은 왕실만의 비극도 아니었다. 의리와 충절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선비 정신에 대한 도전이고, 유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정신을 훼손한 사건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고(故) 함석헌 선생(1901~1989)은 저서 ‘씨알의 소리’에서 세조의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권력 찬탈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육신을 기리며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라고 애도했다. 이 글은 서울 동작구 사육신공원 입구에 새겨져, 단종과 사육신 사건이 지금도 되새길 만한 역사임을 웅변하고 있다.
영월 단종 유적지에 인파 몰리는 이유
세상을 떠난 지 570년 가까이 된 단종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각종 드라마와 영화 소재로 등장하면서 묘소에 참배 행렬까지 이어지는 현상은 풍수적으로도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하다. 좋은 기운을 가진 땅, 즉 풍수 명당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붐비는 가게, 소원을 비는 이가 들끓는 기도처, 가문을 빛낸 선조의 음택(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장릉과 청룡포도 명당에 해당할까.먼저 청령포는 서강이 삼면으로 돌아 흐르고,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얼핏 보면 배산임수의 품격을 갖춘 터라 할 수 있겠지만, 나룻배 없이는 건널 수 없는 빠른 물살, 칼날처럼 가파르고 좁아 오르기 힘든 암벽 능선은 이곳이 천연 감옥임을 말해준다. 단종이 머문 청령포 어소 또한 터 기운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곳이다. 정권을 가로챈 세조 측에서 단종을 좋은 곳에 머물게 했을 리 없으니, 의도적으로 고른 터라 할 수 있다.
그럼 장릉은 어떨까. 단종은 사망 후 한동안 방치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신에 손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왕의 서슬 퍼런 엄명 탓이다. 이후 당시 지역 호장(戶長·향리) 엄흥도가 몰래 시신을 수습했는데, 고사에 따르면 엄홍도는 산에 올라 단종 시신을 묻을 자리를 찾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노루 한 마리를 목격했다. 겨울철 눈이 내리는 시기였는데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만 눈이 쌓이지 않은 것을 보고 바로 그곳에 단종 시신을 묻었다. 이 자리가 지금 장릉이라고 한다.

노루가 정해준 묘 터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강원 영월군 장릉.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명당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힘
전북 김제시 화포리에 있는 진묵대사(1562~1633)의 모친 묘는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성모암이라고 부르는 이 묫자리는 ‘동방의 석가모니’로 불리던 진묵대사가 직접 선택한 곳이다.진묵대사는 효심이 남달라 출가 후에도 모친을 모셨다고 한다. 여름날 노모가 모기로 고생하자 산신을 불러 “모기떼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진묵대사는 생전에 “내가 후손을 남기기 못하더라도 어머니 묘의 향불이 1000년간 이어지게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성모암에 유해를 모시자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나갔다.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를 벌초하고 향을 바치며 공양을 올린 뒤 기도하면 중한 병도 낫는다는 소문이었다. 이후 이 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뤄진다는 소문이 더해졌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순례객이 모여들었다.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자손에게 전달되지 못한 명당 기운을 대신 누리려고 찾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묵대사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묘 옆에는 향초가 빼곡하다. 소원을 빌려고 오는 이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특히 선거철이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시기에 사람이 더욱 북적인다. 진묵대사가 어머니에게 한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터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명당은 또 있다. 강원 춘천시 우두산(牛頭山) 소슬묘(혹은 솟을묘)라는 곳이다. 우두산은 생김새가 하늘에서 내려온 소머리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높이 133m로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법한 이 산 정상에 소슬묘가 있다. 산 입구부터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하는 이 묘에는 한국을 넘어 중국, 일본까지 널리 퍼진 특별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1814~1888)은 1871년 발간한 저서 ‘임하필기’에 소슬묘 답사기를 남겼다. “우두산에 옛 무덤이 하나 있는데 주민들이 청조(淸祖: 청나라 시조)의 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유원이 주민들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는 이렇다.
“묘를 파보니 정황기(正黃旗: 테두리가 없는 노란 깃발)만 나와 모두 두려워하면서 봉분을 다시 만들려 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봉분이 저절로 전처럼 솟아났다. 그 후로 소나 말이 와서 무덤을 짓밟아도 다시 전같이 솟아났다. 그래서 이 무덤을 스스로 솟은 산이라는 의미로 ‘솟을뫼’(自聳山·자용산)라고 부른다.”

강원 춘천시 우두산 소슬묘(오른쪽)와 조선시대에 지은 누각 조양루. 안영배 제공
자손 없어도 배향 끊이지 않는 춘천 소슬묘
한편 소슬묘의 존재는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까지 소문이 났다. 중국에서는 명나라를 창건한 황제 주원장의 조부 묘라는 그럴 듯한 스토리가 나돌았다. 고려 때 주원장의 부친이 조선에 들어와 명당을 찾다가 춘천 우두산에서 명당 혈을 발견하고 비밀리에 아버지 유해를 묻은 뒤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후 태어난 아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소슬묘는 주원장 후손과 중국인 관광객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장소가 됐다.조선시대에 ‘중국 황제의 조상 묘’로 알려졌던 이곳이 일제강점기엔 일본 조상신의 묘로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진다. 이 묘가 일본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남동생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殘嗚尊)의 묘역이라는 내용이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신라(한반도) 소시모리에 강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소시모리가 바로 소머리, 즉 우두산이라는 그럴듯한 근거도 더해졌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관리들이 춘천을 방문할 때면 이곳에 들러 참배하곤 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시절, 춘천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도 이곳에 들러 절을 했다고 한다. 소슬묘가 빼어난 길지임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풍수계 일각에서는 성모암이나 소슬묘 등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땅 기운보다 땅에 스토리를 입힌 사람들의 마음(기운)이 담긴 인작(人作) 명당으로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파급력은 자연 그대로인 명당보다 큰 것이 사실이다.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는 사람이 명당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사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