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규칙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창의력이 생명인 논술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논술답안 작성의 형식에서 규칙의 신봉은 두드러진다. 학생 답안을 평가하다 보면 거의 예외 없이 확인되는 게 있다. 1000자 내외의 비교적 짧은 답안에서도 서론-본론-결론을 다 갖추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학생들이 논술 전문가에게서 배운 서론-본론-결론의 작법을 답안 분량과 관계없이 무조건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해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은 1600자 정도의 답안 분량에서 하나의 규칙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학생들은 논술 전문가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으므로 무작정 그런 형식을 맹신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전문가들의 가르침이 오히려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를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이번 호에서는 답안 작성의 규칙도 경우에 따라 파괴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먼저 다음 글을 보자.
스승으로서의 이동백이나 임방울의 자질을 곰곰 생각해볼 때, 그들에게 결함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진짜 판소리의 스승다운 교수법을 관철하려 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저 앵무새같이 곱살하게 흉내나 내고, 판에 박은 듯한 가락수나 되풀이하는 정도의 삼류가수라면 모르지만, 그 진수를 전수받는 궁극의 차원에 있어서야 어찌 기계적인 반복이나 안이한 모방으로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이동백을 잇기 위해서는 이동백을 뛰어넘어야 하고, 또 임방울을 잇기 위해서는 오히려 임방울과 작별하여 자신의 절망과 부딪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생트 뵈브던가 누구던가 하는 사람은 ‘2류 시인은 교육으로 가능하나 1류 시인은 교육으로 불가능하다. 2류 시인은 규칙을 준수하나 1류 시인은 규칙을 창조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바 있다. 넓게 보면 모든 문학, 예술에 두루 통용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천이두 ‘천하명창 임방울’
이동백, 임방울이라면 일제 때 전성기를 누린 판소리 명창들이다. 특히 임방울은 요즘 서태지와 맞먹는 판소리 레코드 판매량을 지닌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당시 민중은 왜 임방울에게 그토록 열광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과 가락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의 창조성을 학생들 논술 답안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학생들은 논술 전문가가 아니다’란 말도 덧붙여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학생들이 기존 논술 작법을 맹신한다면 사고는 그 고정된 틀 안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고정된 사고는 논술 평가의 핵심인 창조성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기실 논술답안 작성법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예컨대 몇 년 전엔 서론의 마지막 문장에서 반드시 문제 제기를 하라고 가르쳤는데, 요즘은 그곳에 직접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 채점 교수의 관심을 더 끈다. 학생들에게 이 같은 미세한 차이를 얘기해주면 가뜩이나 어려운 논술을 더 어렵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답안 작성의 큰 틀은 유지하되 작은 부분을 독특하게 써보면 어떨까? 예컨대 1600자가 넘는 글의 경우, 서론에서 직접 논점을 파고들어 강력한 주장을 하고, 본론에서 반대 의견을 끌어들여 치밀한 논리로 반박한 다음 창의적인 주장을 하고, 결론에서 서론에서 주장한 것을 다시 제시하는 수미상관식은 어떨까? 나만의 강력한 답안 이미지가 채점 교수에게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1000자 내외의 글은 논제의 요구에 대해 직접 답을 적는다는 심정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문장을 연결할 때도 접속어의 사용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학생들은 논술답안 작성법도 창조의 대상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채점 교수의 관심을 끌려면 논술의 기존 틀을 부분적으로 허물어야 한다. 평범한 답안은 기존의 규칙을 준수하지만, 교수의 관심을 유발하는 답안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한다. 단, 여기서 규칙을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의 논술답안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기존 틀을 바탕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틀을 만들어 입히라는 것이다. 학생들이여, 논술답안 작성 규칙을 하나씩 창조해보자.
엄밀히 말해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은 1600자 정도의 답안 분량에서 하나의 규칙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학생들은 논술 전문가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으므로 무작정 그런 형식을 맹신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전문가들의 가르침이 오히려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를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이번 호에서는 답안 작성의 규칙도 경우에 따라 파괴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먼저 다음 글을 보자.
스승으로서의 이동백이나 임방울의 자질을 곰곰 생각해볼 때, 그들에게 결함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진짜 판소리의 스승다운 교수법을 관철하려 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저 앵무새같이 곱살하게 흉내나 내고, 판에 박은 듯한 가락수나 되풀이하는 정도의 삼류가수라면 모르지만, 그 진수를 전수받는 궁극의 차원에 있어서야 어찌 기계적인 반복이나 안이한 모방으로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이동백을 잇기 위해서는 이동백을 뛰어넘어야 하고, 또 임방울을 잇기 위해서는 오히려 임방울과 작별하여 자신의 절망과 부딪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생트 뵈브던가 누구던가 하는 사람은 ‘2류 시인은 교육으로 가능하나 1류 시인은 교육으로 불가능하다. 2류 시인은 규칙을 준수하나 1류 시인은 규칙을 창조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바 있다. 넓게 보면 모든 문학, 예술에 두루 통용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천이두 ‘천하명창 임방울’
이동백, 임방울이라면 일제 때 전성기를 누린 판소리 명창들이다. 특히 임방울은 요즘 서태지와 맞먹는 판소리 레코드 판매량을 지닌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당시 민중은 왜 임방울에게 그토록 열광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과 가락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의 창조성을 학생들 논술 답안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학생들은 논술 전문가가 아니다’란 말도 덧붙여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학생들이 기존 논술 작법을 맹신한다면 사고는 그 고정된 틀 안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고정된 사고는 논술 평가의 핵심인 창조성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기실 논술답안 작성법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예컨대 몇 년 전엔 서론의 마지막 문장에서 반드시 문제 제기를 하라고 가르쳤는데, 요즘은 그곳에 직접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 채점 교수의 관심을 더 끈다. 학생들에게 이 같은 미세한 차이를 얘기해주면 가뜩이나 어려운 논술을 더 어렵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답안 작성의 큰 틀은 유지하되 작은 부분을 독특하게 써보면 어떨까? 예컨대 1600자가 넘는 글의 경우, 서론에서 직접 논점을 파고들어 강력한 주장을 하고, 본론에서 반대 의견을 끌어들여 치밀한 논리로 반박한 다음 창의적인 주장을 하고, 결론에서 서론에서 주장한 것을 다시 제시하는 수미상관식은 어떨까? 나만의 강력한 답안 이미지가 채점 교수에게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1000자 내외의 글은 논제의 요구에 대해 직접 답을 적는다는 심정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문장을 연결할 때도 접속어의 사용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학생들은 논술답안 작성법도 창조의 대상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채점 교수의 관심을 끌려면 논술의 기존 틀을 부분적으로 허물어야 한다. 평범한 답안은 기존의 규칙을 준수하지만, 교수의 관심을 유발하는 답안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한다. 단, 여기서 규칙을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의 논술답안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기존 틀을 바탕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틀을 만들어 입히라는 것이다. 학생들이여, 논술답안 작성 규칙을 하나씩 창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