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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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스트레스 공화국’ 한국인이 사는 법

눈이 핑핑 도는 초고속 변화 적응 치열한 삶 … 개인 아픔 함께 치유 사회적 관리 움직임

  • 송문홍 기자 songmh@donga.com

    입력2006-09-13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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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 ‘스트레스 공화국’ 한국인이 사는 법
    “근본적인 변화가 사상 최고의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미래학자 레이 쿠르츠바일이 한 말이다. 그는 인간 역사에 수학적 모델링 기법을 적용한 결과 근본적인 변화가 사상 최고의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원후 1000년 이전만 해도 인간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전환(패러다임의 전환)은 보통 수천 년에 걸쳐 일어났다. 그러던 것이 기원후 1000년 이후부터는 100년마다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1800년대에 와서는 이전 900년 동안 이뤄진 것 이상의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또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80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가 첫 20년 동안에만 나타났다. 2000년에는 한술 더 떠 10년마다 패러다임이 바뀌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쿠르츠바일은 21세기에는 20세기보다 1000배나 많은 기술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전망한다(톰 피터스, ‘미래를 경영하라’, 2005).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이 같은 세계적 차원의 변화는 오히려 거북이걸음이다.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 속도가 우선 그렇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953년 13억 달러에서 2004년 6801억 달러로 520배 커졌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 또한 53년 67달러에서 63년 100달러, 77년 1000달러, 95년 1만 달러, 2004년 1만4162달러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53년의 67달러는 물가 변동을 감안한 2004년 가치로 42만6000원이며, 이는 2004년 1인당 소득(1621만원)의 약 10일치에 해당한다(한국은행, ‘숫자로 보는 광복 60년’, 2005).

    정치발전은 또 어떤가. 선진국들이 200~300년 걸려 이룩한 민주정치 체제를 우리는 불과 40~50년에 이뤄냈다.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 속도와 저출산 부문에서도 세계 톱 랭킹 국가 군(群)에 든다. 그런가 하면 한국은 세계 첨단의 정보통신(IT)기술 전초기지, 최신 상품의 테스트마켓으로도 자리를 굳혔다. 지금까지 한국이 선진국들을 바라보며 달려왔다면, 앞으로는 선진국들이 한국의 변화상을 참고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멀쩡한 정신상태가 오히려 이상한 일



    이처럼 ‘초고속 변화사회’ 속에서 한국인들이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연세대 의대 민성길 교수(정신과)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여러 인자(因子) 중 첫 번째로 ‘변화의 강도와 빈도’를 꼽는다. 40~50년 사이에 농업사회에서 산업화 단계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다른 나라가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차례 겪었던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과 한두 세대 만에 모두 경험한 셈이다.

    세계 최고 ‘스트레스 공화국’ 한국인이 사는 법
    실제로 한국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3월 울산대 의대, 서울대 의대, 고려대 의대 연구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장수(長壽)에 가장 큰 걸림돌은 1위 뇌중풍(뇌졸중), 2위 교통사고, 3위 자살, 4위 간경화, 5위 간암의 순으로 나타났다. 모두 스트레스와 직·간접으로 관련되는 항목들이다. 보고서에는 또 한국 남자의 조기 사망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이며, 일본보다 1.7배나 높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가족구조의 급격한 변화, 평생직장 개념의 소멸, 가계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사교육비, 전반적으로 미비한 노후 대비,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채 갈등만 부추기는 정치적 리더십 등 한국인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요인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러니 한국 남성의 흡연율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고(2001년 61.8%), 한국인의 자살 건수 또한 10년 전보다 2.7배나 증가해 OECD 국가 가운데 최고일 수밖에 없다(통계청, ‘2004년 사망원인 통계’).

    다른 사람 의식하는 삶이 스트레스 가중

    IMF가 터진 직후인 1997년 12월, 삼성경제연구소가 ‘스트레스로 인한 사회변화 트렌드’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를 의학적 관점이 아닌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아마도 국내 최초의 보고서였다. 한국사회의 스트레스 요인을 구조적 요인(남북분단, 높은 인구밀도 등)과 급속한 사회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요인(교통체증, 높은 사교육비, 불합리한 비즈니스 관습, 세대간 가치관 차이, 지도층에 대한 불신 등)으로 나눠 설명한 이 보고서는 결론에서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국가적 리더십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개인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원인도 다른 스트레스를 정부가 무슨 수로 ‘관리’할 것인가. 정부가 스트레스를 관리하겠다며 또 다른 ‘정책’을 들고 나와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것보다, 기존 정책 중 한두 가지라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아무튼 당면한 과제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하면 줄여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는 한국인의 성향이 해법 찾기를 더욱 어렵게 한다”고 설명한다.

    “도시화, 급격한 변화 등이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는 점도 맞지만, 한국인의 경우 더 근본적인 스트레스 요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늘 의식하며 산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자기 정체성이 약하다는 의미다. 자기 정체성이 약한 사람은 집단에 속해 있고, 남들 눈에 띄지 않을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흉금 없이 자기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모임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튀는 주장을 하거나 돌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왕따시키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래저래 한국인은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회복지 전문가들 중에는 스트레스의 사회적 관리를 위해 친구, 종교단체, 지역사회, 동호회 등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지지망(Supporting network)을 형성하는 일이 긴요하다는 대안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개인주의적 서구문화가 팽배하고, 이혼 등 가족해체 현상이 갈수록 두드러지며, 독신가구 또한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네트워크에 속하는 것은 개인의 소외감과 스트레스 극복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가정의학 개업의인 송향주 원장의 말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일본 등 40개국에 결성돼 있는 ‘엘더호스텔(Elderhostel)’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엘더호스텔은 평생교육을 모토로 내세우는 비영리기구인데 지역사회의 대학, 문화기관, 국립공원 등과 연계해 교육, 여행, 봉사, 취미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회원들은 엘더호스텔을 이용해 자신이 사회의 의미 있는 구성원임을 자각하고, 내면의 아픔도 치유해나간다. 이젠 국내에도 이런 류의 자발적인 시민활동이 활성화돼야 할 때라고 본다.”

    실제로 국내 일각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서서히 싹 트고 있다. 9월부터 연세대 사회교육원에 ‘스트레스와 건강관리’ 강좌를 개설한 ‘4840포럼’이 단적인 예. ‘40대에 80대를 대비하고, 80대를 40대처럼 살자’는 모토로 설립된 4840포럼은 우리 사회의 중·장년 세대를 위한 상호부조 네트워크 형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스트레스 공화국’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원망만 할 것인가. 아니면 자구책을 찾을 것인가. 지금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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