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있는 ‘스타시티’ 카지노 전경(좌).<br>호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인오락기 게임 ‘나일의 여왕’(우).
호주에서는 성인의 80%가 각종 도박을 즐긴다. 호주 통계청에 따르면 2004년 한 해 동안 호주인이 도박으로 지출한 돈은 174억 호주달러(약 12조7000억원). 국가 예산의 40%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국민 1인당 952호주달러(약 76만원)를 도박으로 쓴 셈이다. 그 결과 1인당 가장 많은 돈을 도박으로 잃는 나라가 바로 호주다. 도박컨설팅업체 ‘글로벌 베팅 · 게이밍 컨설턴트’에 따르면 상당한 격차를 두고 싱가포르, 미국 등이 호주의 뒤를 잇는다고 한다. 부자 나라 호주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금액으론 슬롯머신, 참여인원으론 로또 ‘최고’
“좋건 싫건 도박은 호주의 역사이자 문화이며 삶의 일부다.”
8월15일 종전 61주년을 맞아 호주 재향군인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존 하워드 호주 총리가 ‘투업(Two up)게임’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나무판자에 올려놓은 동전 2개를 높이 던져 얻은 결과로 승부를 가르는 이 게임은 1850년대 호주의 금광시대(gold rush) 때 광부들이 개발한 사행성 도박이다. 유럽에서 유행하는 카드게임을 할 형편이 되지 않아 고안한 단순한 방식의 도박게임이다.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 병사들이 전쟁의 공포를 잊기 위해 투업게임을 한 것이 전통으로 자리잡아 호주의 현충일인 앤작데이(ANZAC-Day)에 재향군인클럽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이 게임을 재현한다. 물론 호주의 카지노에 가면 투업게임에 참가할 수도 있다.
호주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D. 던스턴 씨가 쓴 칼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주의 도박은 호주 역사와 함께 변천해왔다. 18세기 호주 식민지 개척시대에 호주는 죄수와 자유이민자, 그리고 현실도피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그야말로 도박을 하듯 생을 결판내자며 신대륙 호주로 건너온 것이다.”
1808년 마커스 클라크가 쓴 소설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돈과 옷, 식량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체로 노름판 뒷전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건 예사였다. 하다못해 동전 던지기를 해서라도 도박의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골목은 늘 소란스러웠다.”
호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박게임은 로또다. 호주 국민의 약 90%가 연 3회 이상 로또를 구입한다. 호주의 상징인 오페라하우스도 전액 로또 판매 수익금으로 건립됐다. 오페라하우스 건립 이후 호주 국민들은 로또로 돈을 잃고도 ‘몽땅 털렸다’는 허탈감을 덜 갖게 됐다. 로또 수입이 주 정부의 주요 예산으로 활용되고, 공공사업에도 쓰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잃은 돈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자위하는 셈이다. 호주에서는 죄수들도 로또를 한다. 최근에는 시드니 소재 한 교도소에 복역 중인 72세의 죄수가 2호주달러(약 1600원)로 800만 호주달러(약 64억원)의 행운을 잡아 화제가 됐다.
호주의 대표적 아이콘인 오페라하우스는 전액 로또 수익금으로 건립됐다.
‘나일의 여왕(Queen of the Nile)’은 호주에서 가장 인기 높은 슬롯머신. 호주의 ‘바다이야기’인 셈인데, 바다이야기의 연타 기능(점수를 다음 게임으로 이월시키는 것)이 호주에서는 7회까지 가능하다는 점이 다르다. 최대 64배의 당첨금이 나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둘 다 똑같은 사행성 성인오락이지만, 한국의 오락기 수익금이 조직폭력의 자금으로 쓰이거나 정치권의 로비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반면, 호주의 오락기 수익금 대부분은 지방정부의 세금으로 납부되고 있다. 또 호주에서는 현금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사행성을 최대한 억누르기 위해 수표나 신용카드는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조작 원천봉쇄, 수익 대부분은 세금으로
호주에서는 사행성 성인오락기의 승률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한국과 다르다. 만약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카지노관리법 1991’에 의해 징역형에 처해진다. 또한 게임장 소유주나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은 게임에 참여할 수 없다. 2001년 시드니 서남부 지역 관리책임자가 친척들에게 게임정보를 주어 돈을 따게 했는데, 결국 감옥에 갔다.
이러한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이 바로 ‘게임(도박) 및 경마부(部)’ 장관이다. 도박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장관을 두는 나라는 호주밖에 없을 듯하다. 그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도박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도박으로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호주의 전통 도박 투업의 게임기구(위).<br>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 갑판에서 투업게임을 즐기는 군인들(아래).
하지만 ‘도박 장관’이 있다고 해도 도박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호주 통계청의 2005년 발표에 따르면, 호주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약 42만 명이 도박 문제로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가정이 해체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들 도박중독자 중에는 한인교포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시드니에 사는 동포들은 ‘스타시티 카지노’를 우스갯소리로 ‘별들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많은 돈을 잃은 한 한인교포는 “스타시티는 절망의 바이러스가 네온사인처럼 점멸하던 저승사자의 음습한 제국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였고, 탐욕만이 횡행하는 아수라였다”고 절규했다. 약 5년 동안 한국인 도박중독자들을 상담해온 박주혜 씨는 “특히 유학생과 여행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호주에서 슬롯머신 게임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의 평생 승률을 따져보니 그는 1달러를 잃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승패가 불확실한 도박에서 딱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도박장은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도박 전문가의 말도 있다. 이 정도면 대충 도박의 실태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