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불행한 가족은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
- 톨스토이
1. 스토리 오브 어스
토닥토닥 잘도 싸우던 두 친구 해리와 샐리가 결혼해서 15년이 지났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이 키우느라 팍삭 늙어버린 멕 라이언이 허리가 31인치인 아줌마가 되어 화장실 청소나 하고 있다면? ‘스토리 오브 어스’는 ‘해리가 샐리와 결혼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결혼생활이라는 일상으로 누빈 퀼트이불 같은 코미디다. 결국 좋든 싫든, 밉든 곱든 남편과 아내로서 우리의 삶은 ‘역사’였다는 것. 연출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대본이 주는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느낌과 대사의 재치가 톡톡 튄다.
2.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영국을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 마이클 커티스의 영화로,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둘러싼 노총각 노처녀의 풍속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네 번의 진부한 결혼보다는 한 번의 장례식에 울려 퍼지는 영국 시인 오든의 시가 더 멋있다. ‘그는 나의 북쪽이었고 남쪽이었고 동쪽이었고 서쪽이었다. 그는 나의 주일, 나의 휴일,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말, 나의 노래였다’는 통렬한 고백. 결혼과 장례식. 인생을 요약하는 삶과 죽음의 세리머니 속에서 정말 오래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간이 딱 맞게 버무려놓았다.
3. 여인 사십
며느리 생일에 와서도 모처럼 식탁에 오른 요리만 비우고 돌아가는가 하면, 신발은 여자가 신겨주는 거라며 임전무퇴의 마초 정신을 보여주던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더니 어린아이가 돼버렸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딸도 아들도 손자도 못 알아보는데 며느리만은 알아본다. 양로원에서 명찰을 달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시아버지에게 명찰이 아니라 훈장이라며 넌지시 가슴에 달아주고, 한밤중에 적이 침입했다고 소리를 지를 경우 집이 아니라 방공호로 돌아가자고 하면 설득된다. 결국 가족간 대화란 그 사람의 구두를 신고 그 사람의 언어를 배워가는 것. 허안화 감독의 이 영화가 실감나게 전해준다.
부부가 함께 보면 좋은 영화들. ‘인어공주’(왼쪽) ‘미스 리틀 선샤인’.
“시방 니들이 뭘 알것냐?” 이제는 닳고 닳아 현실이란 뼈만 부여잡고 사는 것 같은 어머니는 딸의 애인을 보고는 이렇게 내뱉는다. “아름다운 기억이 없어. 이게 현실이야, 현실”이라고 뇌까리던 주인공 나영은 20대 시절의 부모를 ‘진짜’ 만나면서 비로소 아가씨였던, 그리고 여자였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영화를 본 뒤 저절로 질문하게 된다.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스무 살의 아내는 어떠했던가?’
5. 미스 리틀 선샤인
절대무패 9단계의 동기에 심취한 성공전도사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반발해 2주째 동네에서 파는 닭튀김만 내놓는 엄마. 우주비행사가 되기 전까지는 묵언 수행을 하겠다고 결심한 아들. 밤마다 가족 몰래 헤로인에 취하는 쾌락주의자 할아버지. 그리고 프로스트의 석학이면서 정작 자신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난 게이 교수인 삼촌. 이들은 이 집안의 고명딸인 올리브가 어린이 미인대회의 주 대표로 당선되자 고물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개최 장소인 LA까지 긴 여행을 떠난다. 이혼에 빈털터리, 자살 시도까지 말썽이란 말썽은 골고루 갖춘 이 가족의 모습은 성공이라는 태양을 향해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6 · 7.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아름다운 동반
신혼 때 우리의 모습은 어땠나? 노년의 우리 모습은 어떠할까? 지나온 부부생활을 돌이켜보거나 앞으로의 부부생활에 대해 성찰하고 싶다면 다음 영화를 보기 바란다. 이명세 감독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아기자기한 신혼생활을 통과하는 부부 이야기를 만화적 감수성으로 그렸다. 실제 부부였던 폴 뉴먼과 조앤 우드워드가 등장하는 ‘아름다운 동반’은 무뚝뚝한 관계 속에서 기억의 끈을 놓지 못하는 늙은 부부의 초상을 담담히 그린다.
8. 이웃집 야마다 군
1970~80년대에 학동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년시절의 한 컷으로 떠오를 만화가 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빨강머리 앤’ ‘엄마 찾아 삼만리’. 바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대표하는 그가 이웃집 가족 같은 야마다 군을 내세워 소소한 일상과 삶의 이치를 이야기한다. 기승전결은 없지만 촌철살인의 유머와 리듬감각으로 가족의 심리, 즉 서로가 서로를 조정하고 싶어하는 마음, 힘겨루기, 가족을 방패삼아 때로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 일상의 한 순간을 세밀히 포착한다.
부부가 함께 보면 좋은 영화들. ‘선물’(왼쪾) ‘하나 그리고 둘’.
이정재 이영애 두 톱스타의 멜로물로, 삼류 개그맨인 남편과 투병 중인 아내의 순애보를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렸다. 아내와 함께 보면 어려운 시절 어떻게 버텼는지 떠올리며 애틋한 부부애가 생겨나고, 멜로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점수를 딸 수도 있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다.
10.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감독은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함께 대만이 낳은 세계적 감독이다. 이 영화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인생의 신비, 순환의 기운이 이미 한 가족에 들어 있음을 말해주는 걸작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하고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버거운 인생의 무게는 어느 세대, 어느 가족 누구에게나 동일한 무게로 다가온다. 2시간 반이 넘는 상영시간이 다소 길게 느껴지더라도 포개진 이야기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진주 같은 삶의 성찰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