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의 사탕가게.
그 이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e메일로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무척 고생했던 청소년기에서부터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떠돌았던 청년기, 그리고 늦게 미국인과 결혼해 이제는 잘 살고 있다는 내용까지….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위스콘신에서 심심풀이로 쓰는 편지’라는 e메일을 받고 있다. 한국 지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앙편지로, 가끔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20년 넘게 타향살이를 하다 보니 온갖 것이 그리울 터였다. 그의 편지 중 먹을거리에 대한 글이 있는데, 제목은 ‘추억의 먹거리-조정래 목사’다.
쫀드기, 번데기, 물총주스 … 생각만 해도 군침 저절로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 가난해서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쯤 얼굴에 마른버짐이 꽃처럼 펴, 나 혼자 컴컴한 부엌에 앉아 흰 엿으로 얼굴을 꾹꾹 찍어 마른버짐을 떼내려 했던 기억이 있다. 대여섯 살 때, 설사를 자주 하는 나를 위해 어머니가 시장에서 벌건 수시떡(수수떡)을 사오셨던 기억도 난다. 또 크고 잘생긴 사과는 비싸서 살 형편이 못 돼 작고 흠 있는 사과를 사오셨는데, 그것조차 무척 맛있어 씨까지 다 먹었다. 우리 집 앞 구멍가게에서는 고둥, 수리매(오징어) 껍질, 술찌갱이, 뻥튀기, 풍개, 풋복숭아, 쫀드기, 번데기, 어묵, 팥떡, 팥떡볶이, 고구마튀김, 삶은 감자와 고구마, 물총주스, 찹쌀떡, 박하사탕, 월남방맹이, 떡볶이, 찹쌀도넛, 솜사탕, 진해콩, 카스텔라 등을 팔았다.
어머니가 봄에 쑥을 뜯어 만들어주셨던 쑥떡과 쑥털털이, 막걸리에 밀가루 반죽을 섞어 만든 빵, 도토리묵, 구운 은행, 돼지고기 분탕찌개, 멸치김치국밥, 알찌개, 토끼고깃국, 닭볶음탕, 고구마크로켓, 맛땅, 찐빵, 만두, 포장마차 핫도그, 닭발, 쥐포, 곰장어…. 또 선희 누나가 사카린을 약간 넣고 볶아준 쌀도 잊지 못한다.
그러다 해태, 오리온, 롯데라는 과자회사가 나왔다. 지금도 브라보콘, 맛동산, 뽀빠이, 자야, 티나 크래커, 알사탕, 에이스 크래커, 캐러멜콘, 새우깡, 칠성사이다, 오란씨, 환타, 연양갱이 생각난다. 알사탕 하나를 어금니에 문 뒤 반을 쪼개 동생 석래랑 나눠먹곤 했다. 내가 특히 좋아한 과자는 뽀빠이, 자야, 티나 크래커였다. 청소년 시절, 20원에 자야 한 봉지를 사서 바지주머니에 털어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으면 몹시 흐뭇해지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때는 50원 하던 티나 크래커가 내 입에 딱 맞았다. 누나가 티나 크래커 한 줄을 사주는 날은 천당에 간 듯한 기분이었다.
대학생 때는 주식이 라면이었으며, 개비 담배를 피우고 소주를 마셨다. 친구가 군대 갈 때 오히려 나에게 사준 마산 중성동 뒷골목 식당의 고갈비구이, 군대 철책선에서 야간근무를 마친 뒤 먹었던 푹 퍼진 라면, 강원도 인제 원통터미널 앞의 막국수, 원통시장에서 먹던 염소탕….
이렇게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준 하느님 이하 부모님, 동료, 친구, 친척, 이름 모를 많은 은인들, 또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던져서 먹을거리가 돼준 사랑하는 동식물 자매형제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나도 앞으로 그들처럼 하느님의 뜻 앞에 순순히 목숨을 내놓아 만물의 먹을거리가 될 길이 있을까.
정래야, 우리가 먹었던 게 그냥 음식이 아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