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를 강조한 노자.
어떤 방식으로 사회질서가 유지돼야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은 예부터 끊임없이 전개돼왔다. 먼저 마키아벨리와 한비자(韓非子)의 통찰력이 눈에 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도에 넘친 인자함을 베풂으로써 혼란한 상태가 지속돼 백성들에게 약탈과 파괴를 경험하도록 하는 군주보다 가혹한 군주가 낫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열망한 것이다. 여기에는 지배자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창출되는 질서가 오히려 사회를 안정시키고 자유를 보장한다는 인식이 깃들어 있다.
지도자의 통치방식 국가와 국민은 늘 갈등
한비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현명한 군왕은 법령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고 여러 사람의 말을 단서로 해 진실 여부를 판단한다. 선비가 요행으로 상을 받는 일이 없고,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는 죽이고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간사한 자들이 끼어들 데가 없다”고 주장했다. 엄격한 법령에 따라 강력한 지도력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루소와 노자(老子)의 가르침도 매력적이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는 ‘학문과 예술론’에서 “인간이 만든 인위적 질서가 인간을 질식시킨다. 따라서 자연상태의 인간적 본질로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지배자에 의한 인위적 장치가 너무 많아 인간 본연의 삶을 목 조른다는 것이다.
‘무위(無爲)’를 강조한 사상가로 노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무욕(無知無欲)하고, 사부지자(使夫智者)로 불감위야(不敢爲也)하니라. 위무위(爲無爲)면 즉무불치(則無不治)니라(인간적 지혜와 욕구를 없게 하고, 저들 아는 자로 하여금 감히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즉 지배자의 질서를 강요하지 말고 민중의 자생성에 맡기라는 것으로, 자생성에 맡기면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또 ‘소국과민(小國寡民·작은 나라 적은 백성)’일수록 좋다고 한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작은 정부’론을 펼친 것이다. 여기서 작은 정부란 영토와 인구가 적은 국가가 아니라, 시장이나 시민사회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는 정부를 뜻한다.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위로부터의 질서와 안정’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질서’ 사이의 팽팽한 의견대립을 다룬 바 있다.
“사회의 질서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 성원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부분은 사회를 지배하고 대표하는 몇몇 상층부의 의사에 좌우되게 마련이며, …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협의 관계에 의한 지배질서란 궁극적으로 그 상황의 벽을 무너뜨리는 용기와 희생 없이는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지배자의 적극적 개입은 신속성과 효율성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때 모든 구성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구속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의 시대인 오늘날 국가의 개입은 오히려 예상치 못한, 그래서 미처 대비하지 못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반면 피지배자에 의한 자생적 질서유지는 구성원간 자발적 사회통합을 가져와 훨씬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질서 확립의 속도가 더디고, 그 과정에서 이기적 욕망을 지닌 개체들이 좌충우돌식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홉스, ‘리바이어던’)을 벌일 위험도 적지 않다. 지배자에 의한 효율적이면서도 합목적적 질서 창조와 다소 혼란스럽더라도 민주적이고 자생적 질서를 통한 조화로운 사회통합의 양 갈래 길에서 국가와 국민은 늘 갈등한다. 당신은 어느 길에 서고 싶은가.
- 연관 기출문제
고려대 2006년 정시 ‘질서의 다양한 속성과 측면’, 이화여대 1999년 ‘법과 질서’, 경희대 2004년 수시2 ‘사회적 갈등과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