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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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간 기술자들 마녀사냥?

산업스파이 사건 피해액 뻥튀기 여전 … 신공안 사건 의혹에 인권침해 목소리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7-05-23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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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로 간 기술자들 마녀사냥?
    ‘피해 액수가 크면 클수록 주목받는다.’ ‘대체로 중국 업체들이 부적절한 파트너로 거론된다.’‘관련자들은 매국노로 격하되고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바로 첨단기술 유출사건이 지닌 특징들이다.

    5월10일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기술유출 사건이 적발됐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산업 분야는 반도체 휴대전화 PDP-LCD에 이어, 우리나라 제조업의 상징인 자동차다. 대표산업답게 예상 피해액도 가히 천문학적이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밝힌 예상 피해액은 무려 22조3000억원. 언론 보도를 접한 국민은 자연스레 이 액수를 파렴치한 산업스파이들이 빼돌릴 뻔한 첨단기술의 가치로 인식했다.

    수원지검 형사4부(김호정 부장검사)는 현대·기아자동차 전·현직 ‘직원’들이 신차(코드명 HM) 관련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실을 적발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4월 중순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로부터 관련 내용을 인계받은 수원지검은 한 달 만에 관련자 5명을 구속하고 4명을 불구속하는 성과를 거뒀다.

    e메일 문서 20조원 넘는 피해

    현재 재판 중이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 사건 역시 과거 논란이 됐던 기술유출 사건들과 뼈대가 유사해 흥미롭다. 첨단기술의 최종 목적지가 ‘제조대국 중국’이라는 점, 대기업 제보를 받고 수사에 착수한 국정원이 검찰과의 ‘찰떡공조’를 과시하며 수사를 마무리한 점, 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 모두가 평범한 생산직 사원이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기아차 기술유출 사건의 피의자들은 생산 현장에서 퇴직한 뒤 자동차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 중국 등 개발도상국 업체들과 거래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문제는 지난해

    11월부터 4월까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현대·기아차 직원들에게서 모두 9차례에 걸쳐 ‘신차 개발 일정’ ‘소렌토 승용차 차체조립 및 검사기준과 관련한 신차 품질보증시스템 운영표준’ 등을 건네받으면서 비롯됐다. 이들은 57개 영업비밀 자료를 e메일로 넘겨받아 중국 C자동차에 전달했다. 이들이 불법으로 기술이전을 해준 것에 대한 대가는 2억3000만원. 20조원이 넘는 예상 피해액에 비하면 ‘껌값’에 불과한 액수다.

    곰곰이 따져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국정원이 밝힌 ‘천문학적’ 피해액의 구체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공학박사 출신도 아닌 기술직 사원들이 e메일로 주고받았다는 문서에 정말 그처럼 엄청난 가치의 핵심기술이 담겨 있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그토록 귀한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기아차의 허술한 보안시스템도 관심거리다.

    먼저 현대·기아차가 주장하는 22조원대 피해액의 산출 근거를 살펴보자. 이에 대해 검찰과 국정원은 이구동성으로 “현대·기아차 관계자가 제시한 계산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 계산법은 현대·기아차의 연간 600만대 생산에 따른 매출액을 기준으로 삼았다. 기술유출의 상대가 중국 업체이기 때문에 중국시장에서의 피해액수 계산은 다음과 같다.

    “현대차 수준의 중국산 자동차가 출시될 경우 중국에서 국산차 판매율이 10% 정도 잠식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향후 판매 및 생산계획을 기준으로 한 피해 대수는 29만7000대, 매출 손실액은 약 4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는 대당 1500만원, 피해기간을 3~4년으로 잡은 결과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의 피해액 계산법도 이와 동일하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5% 정도 매출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에 피해 대수는 82만3000대, 매출 손실액은 약 17조6000억원으로 추산된다는 것.

    매출액에 근거한 이 같은 피해 예상치는 국정원에 통보됐고, 이는 다시 검찰을 통해 언론에 제공됐다. ‘22조원’이라는 천문학적 피해 관련 속보가 포털뉴스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자 누리꾼들은 “첨단기술을 중국으로 유출시킨 매국노를 엄단하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조금만 의심을 갖고 바라보면 이 같은 계산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기술사회 회장을 역임한 고영회(55) 변리사는 무엇보다 기업의 시장가치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5월 현재 기아차의 시가총액은 4조원, 현대차 시가총액은 14조원 정도다. 22조원이라는 액수는 우리나라 자동차회사의 지분을 전체 다 인수할 정도의 규모다. 회사 측 의견만을 대변한 수사 발표로 오히려 검찰의 ‘저의’가 의심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해외로 간 기술자들 마녀사냥?

    국가정보원은 2003년부터 산업기밀보호센터를 설치하고 기술유출 사건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은 적발 사례 없어

    그렇다면 매출액 감소분을 기준으로 한 기술가치 평가는 얼마나 비합리적일까.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체기술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기술의 가치는 달라진다”면서 “만일 유사기술이 존재할 경우 시장가치로 따지면 그만이지만, 독보적인 기술인 경우에는 경제적 파급효과를 다각적으로 고려해 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술유출 관련 법정공방의 핵심 쟁점은 유출된 기술의 ‘중요성’이다. 곽 교수는 또 “R·D 분야의 기술가치를 단순히 매출액 감소분만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은 보유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라고 덧붙엿다. 한마디로 주먹구구에 가깝다는 얘기다.

    자동차업계 전문가들도 현대·기아차가 제시한 피해 액수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는 점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이들은 현대·기아차의 2006년 중국 총매출액이 86억 달러(약 8조원), 2007년 예상 매출액이 최대 100억 달러(약 9조원)라는 수치를 1차 근거로 내놓는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자동차 관련 기술 차이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몇 건의 영업비밀 유출로 중국시장에서의 매출 10% 감소 및 손실액 4조원 예측은 난센스에 가깝다고 한다. 한 예로 현대차가 일본 도요타의 품질관리 문건을 몇 건 훔쳐봤다고 해서 그 노하우를 쉽게 흉내낼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과 검찰은 기술유출 사건 피해액 산정에서 여전히 매출액 기준 계산법을 선호한다. 국민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는 수사기관의 자기과시적 행태라는 비판도 흘러나온다. 실제로 언론에 보도되는 기술유출 사건의 예상 피해액은 해마다 증가해왔다.

    피해액이 1조원대인 6세대 PDP-LCD 기술유출 사건이 대표적인 ‘부풀리기’ 사례다.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에서 “연구개발비에만 3700억원이 투입된 기술로, 향후 1조3000억원 피해를 예방한 수사였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과대포장이었다. 3700억원이라는 연구개발비는 회사가 6세대 공장에 투입한 설비 및 인건비의 총액, 1조3000억원의 피해규모 역시 1년치 예상 매출액 전체를 둔갑시킨 수치였기 때문이다.

    2006년 삼성전자 휴대전화 기술유출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솔직히 ‘1조원대 국부 유출’ 운운은 삼성 측의 계산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뿐 큰 의미는 없다”고 시인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제까지 기술유출 수사에서 대기업 고위 간부가 적발된 사례가 드물다는 것이다. 그간 국정원이 수집한 유출 관련 첩보는 대체로 중소기업 관계자나, 대기업의 경우 전직 평사원급에 집중됐다.

    그 이유에 대해 기술자들은 “기술유출 혐의는 핑계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대기업이 기술직 사원들의 이직 방지를 목적으로 공권력을 활용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산업스파이 관련 제보가 주로 직원들의 비리를 의심하거나 이직에 불만을 품은 경영진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수사가 평사원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

    2002년 울산에 자리한 중견 화학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이직한 직후 기술유출 혐의로 구속됐던 ㈜ENF의 이승호 과장은 “나 외에도 적지 않은 기술자들이 경쟁업체로 이직했지만, 당시 회사는 이직자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가장 만만한 벤처기업으로 옮긴 나를 선택해 소송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 과장은 이후 4년간의 법정투쟁을 거쳐 2006년

    7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 변호사는 “현행 부정경쟁방지법은 영업비밀을 지나치게 넓게 인정해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면서 “기술직 전문가들의 이직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술유출 혐의로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개인노트북 PC에서 나온 영업비밀로 문제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는 ‘디지털 포렌직(Digital forensics)’ 기법이 보편화돼, 선의의 퇴직자라도 관련 IT(정보기술)기기를 모조리 폐기하지 않는 한 ‘일신상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해외로 간 기술자들 마녀사냥?

    기아차 광주공장 스포티지 생산라인 모습.

    현지 합작공장 기술유출이 더 심각

    그렇다면 검찰과 국정원은 왜 피해액을 과장하면서까지 기술유출 사건에 몰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고 변리사는 “기술유출 수사는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몇 안 되는 분야인 만큼 전망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직 논리로 봐도 이 같은 분석은 설득력을 얻는다. 2000년 이후 매년 30건 이상의 첨단기술 해외유출 사건이 끊이지 않자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응했다고 평가받는 조직이 바로 국정원과 검찰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2003년부터 대(對)산업스파이 부서(산업기밀보호센터)를 2차장(해외파트) 아래 직속조직으로 개편하고 인원을 2배로 늘렸다. 검찰 역시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에 기술유출범죄수사센터를 설치하고 산업스파이 사건에 남다른 의욕을 보여왔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기술유출 사건을 신공안 사건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면서 “검찰과 국정원에서 크게 축소된 공안부서를 기술유출 수사로 대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기술계에서도 인권침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4년 6세대 PDP-LCD 기술유출 사건의 주범으로 1년간 수감생활을 한 김모(39) 씨는 올 초 내려진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라는 모호한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는 “생산관리자로서 대만업체로의 이직을 고민하다 포기한 시점에 갑자기 구속됐다”면서 “그러나 언론에는 ‘1조원 첨단기술을 갖고 대만으로 출국하기 직전 검거됐다’는 식으로 보도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구속 이후 3년간 법정투쟁을 벌여 가산도 탕진한 상태다. 항소하고 싶어도 여력이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축구선수가 해외 진출하면 국위선양이고, 기술자가 해외 진출하면 매국노가 되는 세상 논리가 무섭다.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이민 갈 생각이다.”

    전문가들은 “회사를 옮기는 직원에 의해 기술유출이 이뤄지는 경우보다 인수·합병(M·A)이나 중국 현지 합작공장에서의 기술유출이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기술유출 수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최근 기술유출 사건 예상 피해액(1조원 이상)
    연도 내용 액수 유출 국가
    2004년 현대시스콤 CDMA 기술 1조원 중국
    2004년 LG-필립스 6세대 LCD 기술 1조원 대만
    2005년 하이닉스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12조원 중국
    2006년 삼성전자 최신형 휴대전화 기술 2조원 중국
    2007년 현대 기아 금형 및 품질 관리 22조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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