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5

2006.07.25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미암일기’에 수집 경로 상세히 기술…임진왜란 등 거치며 장서 사라져 아쉬움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7-24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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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미암 유희춘의 유물이 보관돼 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 내부. 유희춘의 후손인 유근영 담양군 대덕면 부면장이 목판을 살펴보고 있다.

    책모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거저 받는 것이다. 나 역시 명색이 공부를 한다 하여, 학계 선후배에게서 귀중한 연구물을 종종 거저 받는다. 출판사에서도 가끔 책을 보내준다. 이렇게 해서 서재에 쌓인 책이 제법 된다. 하기야 엄밀히 말해 거저는 아니다.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들이다.

    각설하고 지난 호에서 미암 유희춘이 교서관과 지방의 책판에서 책을 다시 인쇄해 장서를 구축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이 방법 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책을 모으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앞서 말했다시피 거저 얻는 것이다. ‘미암일기’에는 선물로 받은 책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1) 이산(尼山) 김판윤(金判尹) 수문(秀文)의 편지와 ‘강목(綱目)’ 150책이 선물로 왔다. 백 년에 한 번 있을 큰 은혜라 할 만하다.(1567년 11월9일)

    (2) 김동지(金同知) 홍윤(弘胤)이 ‘의례주소(儀禮註疏)’ 17책을 선물하였다.(1568년 2월16일)

    (3) 전 찰방(察訪) 권공(權公) 수약(守約)이 ‘문한류선(文翰類選)’ 당본(唐本) 64책, ‘초당두시(草堂杜詩)’ 10책, ‘동래박의(東萊博議)’ 2책을 보내왔다. 큰 선물이다.(1568년 8월18일)



    (4) 저녁에 병조참의 박군(朴君) 근원(謹元)이 당본 ‘통감(通鑑)’ 9책을 보내왔다. 너무나도 큰 선물이다.(1570년 6월13일)

    ‘미암일기’에는 이런 대가 없는 책의 기증 사례가 허다하다. 물론 서적을 선물한 사람이 어떻게 해당 서적을 마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친교가 있는 지방관이 유희춘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을에서 제작한 목판본을 그에게 기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또 자신에게 필요 없는 책을 유희춘에게 증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증 방식은 사대부 사회 내부에서 서적을 유통시키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로 상정할 수 있다.

    중개인 통해 책 팔 사람 수소문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모현관 인근에 있는 미암사당.

    한데 기증 역시 유희춘이 서적을 손에 넣었던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기증은 타인의 호의에 기대는 불확실한 방법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서적을 구입하려 한다면 공짜가 아닌, 즉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구입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매매다. 그는 상당한 양의 책을 매매하고 있다. 책의 매매라면 즉각 서점을 떠올리겠지만, 유희춘의 시대에는 서점이란 것이 없었다. 유희춘의 서적 구입은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에 가깝다. 다음 예를 보자.

    (1) 교서 저작(著作) 정염(丁焰) 군회(君晦)가 찾아와 함께 ‘예기(禮記)’를 화매(和賣)하여 사는 일과 ‘본초(本草)’의 빠진 권(卷)을 인출(印出)하고, ‘서하집(西河集)’을 인출하는 등의 일을 의논하였다.(1568년 6월13일)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미암일기’의 한 부분. 허준을 내의원 의관으로 추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빨간 줄 친 부분).

    (2) 고 참판 김안정(金安鼎)의 얼자(孼子)로 관상감 참봉을 맡고 있는 상(祥)이 나첨정(羅僉正)을 통해 내알(內謁)하였는데, 나는 그에게 ‘두시(杜詩)’를 팔 사람을 찾아보게 하였다.(1568년 7월28일)

    (3) 박원(朴元)이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자치통감(資治通鑑)’ 12권을 가지고 와서 매매(賣買)를 의논하고 갔다.(1570년 10월5일)

    (4) 박원(朴元)이 또 ‘자치통감’ 2권을 갖고 왔다. 전에 가져온 것과 합치면 13권이다. 나는 녹미(祿米) 3두(斗)와 콩 3두를 주었다.(1570년 10월10일)

    (5) 이조원(李調元)이 와서 ‘주역’ ‘맹자’를 화매할 것을 청하였다. 나는 허락하였다.(1573년 4월10일)

    (6) 이여근(李汝謹)이 와서 인삼 8량을 받아 갔다. 곧 ‘사서집석(四書輯釋)’ ‘구본구공집(具本歐公集)’ ‘십일가소설(十一家小說)’ 중 1건을 화매할 요량이었다.(1573년 5월12일)

    (7) 국봉범(鞠奉範)이 ‘옥기미의(玉機微義)’를 가지고 와서 값을 의논하였다. 또 ‘여지승람’은 장악원 하인(下人)에게 있다고 하였다.(1573년 7월1일)

    서적 매매의 사례다. 이런 방식의 매매에는 반드시 중개인이 있다. (2)의 김상, (7)의 국봉범 등이 중개인에 해당하는데, (2)에서는 김상을 시켜 ‘두시’를 팔 의사가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고 있고, (7)은 유희춘의 요구에 따라 국봉범이 ‘여지승람’의 소재처를 알아냈다고 보고하고 있다.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모현관에 보관 중인 목판.

    중국 사신단에 수차례 책 구입 부탁

    ‘미암일기’의 자료에 의하면 중개인은 유희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는 양반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신분이 낮거나 아니면 유희춘보다 여러 모로 아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중개인은 양자 사이에서 가격을 절충한다. 이것이 ‘화매’다. 화매는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과 값을 합의해서 파는 행위’로 두 사람 사이의 가격 절충이다. 가격 절충이 이루어지면 책값이 지급된다. (5) (6) (7)은 서적 대금을 지급한 사례다. 물론 중개인에게도 일정한 수수료를 지급했다.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는 책도 있다. 이런 책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중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한정돼 있으므로 유희춘은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단(使臣團)에 책의 구입을 부탁하기도 했다.

    군기(軍器) 이원록(李元祿) 정서(廷瑞)가 내가 불러서 찾아왔다. 악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문유취(事文類聚)’의 값을 그에게 맡겼으면 했다. 이때 정서가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에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서는 허락하였다.

    무진년(1568) 2월11일의 일기인데, 서장관으로 베이징으로 떠날 예정인 이정서에게 ‘사문유취’를 사올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는 이튿날 서책의 구입가로 녹포(祿布) 2필, 백첩선(白帖扇) 10자루를 보냈고, 이정서는 그것을 받고 책을 구입해오기로 약속하고 있다. 이것도 불안했던지 유희춘은 3월3일 다시 이정서를 찾아갔던 바, 그는 ‘사문유취’를 사오겠다고 ‘깊이’ 약속하고 있다.

    베이징에 갔던 사신단이 돌아왔다는 것을 유희춘이 안 때는 9월6일이었고,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정서를 찾아갔다. 이때 그는 강섬(姜暹)도 방문하는데, 강섬은 그를 위해 원래 ‘거가필용(居家必用)’이라는 책을 사오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튿날인 9월7일 이정서에게서 ‘사문유취’ 60책을 받고 9월8일에 ‘거가필용’ 10책을 받았다. ‘사문유취’의 경우 책을 구입해달라고 부탁한 날로부터 거의 5개월이 지난 뒤였다.

    사고,베끼고,수입해서라도 “내 책으로”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 묘소.

    소유 불가능한 책들은 빌린 뒤 필사

    이처럼 중국 서적을 구입하는 방법이란 사신단에 포함되는 친지를 통해, 책의 비용을 미리 지불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일 뿐이었다. 이것은 역으로 사신단에 포함되는 사람과 모종의 친근한 관계가 없다면 서적의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유희춘은 사신단에 여러 차례 중국 서적의 구입을 요청한다. 이런 사례는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물론 유희춘처럼 사신단에 중국 서적의 구입을 요청하는 것은, 서울의 고급 관료들이 중국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이용하는 주요 루트였을 것이다.

    교서관과 지방의 책판에서 책을 찍어내거나, 기증을 받거나, 구입하거나,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가. 지금은 희귀한 책을 구입할 수 없으면, 복사기에 의한 복제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필사다. 즉, 책을 베끼는 것이다. 유희춘 역시 필사본을 만들고 있다. 물론 스스로 필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거대한 장서를 구축할 수 없다. 당연히 많은 책의 필사를 남에게 의뢰한다. 그 예를 보자.

    (1) 책색서리(冊色書吏) 경용(景鏞)이 나를 위해 베껴주었고, 서사관(書寫官) 이정(李精)이 나를 위해 ‘논어석(論語釋)’을 베껴주었다.(1568년 2월22일)

    (2) 오대립(吳大立)이 필사한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역석(易釋)’을 가지고 내알(內謁)하였다. 나는 황모필(黃毛筆)과 부채를 주어 사례하였다.(1568년 3월28일)

    (3) 조수복(趙壽福)이 내알(內謁)하였다. 나는 백지 1권을 그에게 주고, ‘소문쇄록(聞錄)’을 필사하도록 부탁하였다.(1568년 6월23일)

    (4) 서사관과 책색서리 최언국(崔彦國)을 통해 ‘천해록(川海錄)’을 필사하였다.(1568년 6월23일)

    (5) 서사관 문서린(文瑞麟)이 외조부의 ‘동감론(東鑑論)’을 다 썼다. 정말 기쁘다. 또 ‘상서방통(尙書旁通)’ 2책의 재료를 문서린과 정치(鄭致) 등 4명에게 주었다.(1568년 6월28일)

    (6) 봉상시(奉常寺) 하전(下典) 복룡(福龍)이 와서 ‘금낭집(錦囊集)’을 필사할 재료를 받아 갔다.(1568년 9월12일)

    모두 1568년의 것이다. 위 필사의 예는 그야말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암일기’에는 필사본을 의뢰하는 수많은 자료가 나온다. 필사의 원본은 홍문관과 같은 국가 도서관이나 친지에게서 빌린 희귀본, 또는 간본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경우다. 필사는 거의 타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필사자는 일반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자신 주변의 친지, 혹은 글씨를 잘 쓰는 양반, 서사관과 같은 관청의 전문 필사자, 서리 등이 있다. 필사자에게는 대개 종이를 주고, 필사가 끝나면 필사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했다.

    중앙과 지방의 목판에서 책을 찍어내고, 기증을 받고, 사들이고, 교환하고, 중국에서 수입하고, 필사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유희춘은 거대한 장서를 마련했다. 아마도 그는 이름이 알려진 조선시대 최초의 장서가일 것이다. 그가 장서를 구축한 방법을 검토하면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서적 유통과 집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서적 유통과 집적의 흥미로운 사례인 것이다.

    유희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죽었다. 그의 장서는 조선 전기 사대부 문화를 압축한 것일 터다. 유희춘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지적 활동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장서는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쉽다. 유희춘과 서적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쓸 거리는 많은데, 이것으로 그쳐 더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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