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국제사진살롱전 ‘누드 Nude’ 최죽림 작. 힐버만은 강간이 처녀막이 아닌 개인의 인격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라고 설명한다.
세겜은 세겜 성의 추장으로 야곱에게 은 100개를 받고 밭농사를 지을 만한 땅을 팔았다. 야곱 가족이 얼마간 그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그곳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축제 같은 것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호기심 많은 처녀 디나는 세겜 성 여자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에 마을 잔치에 함께 어울렸다.
그때 디나를 눈여겨보고 있던 추장 세겜이 디나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디나가 거부하자결국 디나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성폭행을 했다. 일이 다 끝났을 때 디나는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흐느껴 울었다. 세겜은 디나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충동적으로 너를 가진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보자마자 너에게 반했다.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한다.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세겜의 말이 디나에게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야곱은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에 떨었다. 당장 칼을 들고 세겜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일하러 들로 나간 아들들이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야곱은 아들들이 돌아올 때까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다가 아들들이 돌아오자 디나가 당한 일을 얘기해주었다. 야곱의 아들들을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심히 근심하고 노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축제 구경 갔다가 마을 추장에게 강간당해
이때 세겜의 아비 하몰이 야곱을 찾아와 아들 세겜이 디나를 무척 사랑하니 디나를 며느리로 삼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몰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면 야곱 가족이 그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생업에 종사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통혼하여 피를 섞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세겜도 아비를 뒤따라와서 디나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기만 하면 어떤 요구라도 들어주고, 어떤 예물이라도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야곱으로서는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딸을 강간한 자를 사위로 삼을 수는 없었다. 야곱의 대답을 듣지 못한 하몰과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과 교섭을 벌이려고 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세겜 성 남자들도 야곱 집안의 남자들처럼 할례를 받으면 누이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스탄불의 한 ‘할례’ 의식.성폭행 문제를 다룬 영화 ‘피고인’의 한 장면.(위 부터)
그 다음 나머지 야곱의 아들들이 시체가 즐비한 성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았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라는 구절로 볼 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 여자들을 강간함으로써 보복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추장이 한 처녀를 강간한 사건이 종족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까지 비화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느 성경책에선 사건에 대해 ‘디나 사건의 교훈’이라고 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을 친절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은 때로 죄를 초래함,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함, 안목의 정욕을 이겨야 함, 자녀의 신앙교육에 힘써야 함 등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디나가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세상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으로, 세겜 성 여자들을 보러 갔다가 강간당했다는 것이다. 다분히 디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듯 설명해놓았다. 말하자면 디나에게 세겜의 욕정을 부추겼다는 혐의를 덮어씌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가 몸조심을 하지 않고 까불다가 일을 당했다는 투다.
성경 해설에서도 이런 식으로 남성 중심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있으니 일반인들의 의식은 오죽하겠는가. 심지어 ‘여성들은 무의식적으로 강간당하기를 원한다’라는 이론까지 내놓은 자들도 있다.
야곱의 아들들 잔혹한 복수 … 누이 위해? 가문 위해?
공격심리 전문가로 알려진 안토니 스토르는 “무방비 상태의 여자를 데리고 성욕을 발산하려는 무자비한 남자에게 붙잡혀 능욕당한다는 상상은 여성의 섹스 욕구에 폭넓은 호소력을 갖는다”라고까지 하였다. 1937년 미국의 여류작가 아나이스 닌은 자신의 일기장에 “성폭행을 당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남몰래 느끼는 여성의 에로틱한 욕망이 아닐까”라고 적고 있다.
헬렌 도이치라는 학자는 “여자는 그들의 꿈이 증명하듯 무의식적인 강간 환상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집트에는 ‘여자는 연이어 열 번이나 강간을 당한 다음에야 비로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해괴한 속담까지 있다.
강간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조차 강간을 당한 피해 여성에게 오히려 성적으로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느냐, 옷을 야하게 입고 있지 않았느냐, 위험한 곳에 일부러 혼자 있지 않았느냐 등을 따지며 강간 범죄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판을 끌고 가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17세기에는 강간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섹스 도중에 성적 흥분을 느꼈다면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학자들도 있었고, 요즘도 재판 과정에서 피해 여성에게 오르가슴을 느꼈느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판사들이 있다.
사실 강간이라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피해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게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피해 여성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심한 혐오감과 수치심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오르가슴은 조건반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즉 사형을 앞둔 사형수가 오르가슴을 느끼는 경우와 같이 극심한 공포 속에서 느끼는 일종의 이상현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강간 환상이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 강간을 당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그 상상이 실제 상황이라면 어쩌겠는가? 그것은 강간 피해 여성들의 심각한 후유증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피해 여성들에게서 지속적인 악몽, 광장·밀실·군중·배후 공포(자기 뒤에 있는 사람에 대한 공포) 등이 후유증으로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공포는 무엇보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공포와 성적 공포다. 평소에 성적으로 적극적이던 여자들도 강간 피해 이후 성관계를 하려면 강간으로 인한 성적 공포 때문에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린다고 한다.
힐버만이라는 학자가 말한 것처럼 강간은 처녀막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개인의 인격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임이 틀림없다. 처녀막은 수술로 재생이 가능하지만 깊이 상처받은 인격은 좀처럼 회복되기 힘든 법이다.
누이 디나가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은 그런 잔혹한 복수극을 벌인 것인가. 어쩌면 자신들의 가문이 수치를 당했다는 의식이 더욱 강하였을 것이다. 그런 탓에 오히려 누이 디나에게는 남성 중심적인 편견을 가진 재판관들처럼 몸가짐을 잘못했다고 크게 꾸짖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