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시장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
홍콩인 패니 리 씨는 비무장지대(DMZ) 투어상품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리 씨는 지난해 6월 반나절 일정의 DMZ 투어에 참가했다. 리 씨를 태운 관광버스는 일정에 없었던 쇼핑매장 두 군데를 들렀고, 그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서울에 도착했다. 그 탓에 리 씨는 홍콩행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인천공항에 도착하느라 애를 먹었다. 리 씨는 “귀금속 매장과 인삼 매장에 들르는 일정은 관광브로셔에 없었기 때문에 속은 기분이 들었다”며 기분 나빠했다.
중국인 4박5일 상품이 46만원 ‘상식 밖의 금액’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 등을 ‘초저가’ 단체여행상품으로 관광한 다수의 한국인들은 “현지 안내원의 쇼핑이나 옵션투어 강요로 매우 불쾌했던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다이내믹 코리아’, 한국을 찾은 외국인 단체관광객들도 마찬가지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한국 여행사도 쇼핑을 강요하는 탓에 외국인 관광객의 불만이 많다. 지난해 한국관광공사 관광불편신고센터에 접수된 259건의 외국인 관광객 불만건수 중 ‘쇼핑 불만’은 51건으로, 불만 유형 1위를 차지했다.
인바운드(외국인 관광객의 한국 관광) 시장에서 쇼핑 강요가 횡행하는 이유는 ‘덤핑상품’ 때문이다. 특히 일본과 중화권(중국, 대만, 홍콩)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단체여행상품은 덤핑상품이 주류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덤핑상품이란 외국 여행사로부터 원가 이하의 지상비(숙박비, 가이드비, 차량비, 관광지 입장료 등)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상품을 일컫는다.
외국인 관광객은 얼마나 싼값에 한국 단체여행상품을 구입할까? 중국 태화여행사는 3980위안(약 46만9800원)짜리 4박5일 한국 단체여행상품을 팔고 있다. 베이징에서 출발해 부산, 제주도, 서울을 관광하고 돌아가는 일정으로, 각 도시를 이동하는 항공요금과 호텔 숙박비, 전 일정의 식사비, 차량비, 가이드비 등이 모두 포함된 ‘상식 밖의’ 금액이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 김수한 씨는 “중국 여행사가 뿌리는 광고지에서 2000위안(약 17만원)짜리 2박3일 서울 단체여행상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면서 “이는 베이징 사람들이 선호하는 국내 여행지인 계림(2800위안), 하이난 섬(3000위안), 윈난성(4500위안)보다 훨씬 싼 금액”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초저가’ 한국관광을 즐기고 있다. 2박3일 일정의 서울 호텔팩(항공권과 숙박만 제공) 상품은 1만8000엔(약 15만3800원)짜리까지 나와 있다. 이러한 호텔팩 상품은 물론 자유관광이지만, 출국 직전 인천공항 근처의 쇼핑센터에 들르는 일정이 빠짐없이 포함돼 있다.
서울 시내의 한 인삼판매점.
덤핑상품이 횡행하는 첫 번째 원인은 여행사 간 과당경쟁이다.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김상태 관광정책연구실장은 “현재 150여 개의 인바운드 여행사가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덤핑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외국 여행사들도 덤핑을 부추긴다. 한국 여행사들을 경쟁시켜 가장 싼 가격을 부르는 여행사에 관광객들을 맡기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지상비를 낮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관광객을 유치한 여행사는 ‘쇼핑 수수료’로 수익을 거둔다. 여행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 쇼핑매장으로 관광객들을 데리고 가 쇼핑을 시킨 다음 쇼핑매장으로부터 매출액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아챙기는 식이다. 보석류는 매출액의 30%, 가죽제품이나 특산품은 10%, 술과 담배는 5% 수준의 수수료가 책정돼 있다. P여행사 중국 인바운드 담당자는 “5~6만원 정도 손해를 보고 유치한 고객이라면 최소한 100달러(약 9만5000원) 이상 쇼핑을 해줘야 손해를 안 본다”고 귀띔했다.
3980위안짜리 4박5일 한국여행 상품을 광고하고 있는 중국 태화여행사 홈페이지.
여행업계 “쇼핑 수수료는 세계적 관행”
이 같은 덤핑 실태에 대해 여행사들은 ‘할 말 많다’는 입장이다. 원가 이하의 지상비를 받고 단체관광객을 유치해 쇼핑 수수료로 수익을 보전하는 방식은 이미 전 세계 여행업계의 관행이라는 것이다. 조계석 실장은 “백화점이 미끼상품으로 고객을 유인하는 마케팅 전략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했다. 모 여행업계 관계자는 “초저가 동남아 단체여행상품을 파는 국내 여행사 중 일부는 현지 여행사에 아예 지상비를 주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항변했다. J여행사 인바운드 실무자는 “국내 여행사만이 경쟁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을 두고는 중국과, 중국인 관광객을 두고는 동남아 및 일본과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덤핑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덤핑상품이 불가결하게 수반하는 부실 서비스와 쇼핑 강요는 한국의 관광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김상태 실장은 “해외여행 가능 인구가 5000만~1억명으로 추산되는 중화권 관광객을 부실 서비스로 놓친다면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미래는 없다”고 충고했다. 한국관광공사 김봉기 마케팅지원실장은 “갈수록 단체관광객이 줄고 자유여행자가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에 덤핑상품의 생명은 오래갈 수 없다”고 전제하며 “고부가가치 관광상품 개발에 주력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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