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는 늘 우연한 계기로 그들의 시간이 겹치게 된다. 전작 ‘살인 혐의’에서 재봉사 이르는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하지만 살인자의 애인을 위해 끝내 입을 다문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미용사 마틸드는 손님으로 찾아온 남자와 지독한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의 절정이라는 무지개를 잡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를 만들던 80년대 이후, 뭔가에 집착하는 신경증적인 인물을 내세워 사랑의 기이함과 운명성을 즐겨 다뤘던 파트리스 르콩트가 ‘살인 혐의’의 어두움과 ‘걸 온 더 브릿지’의 서정성을 함께한 또 다른 작품 ‘친밀한 타인들’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물론 이들도 아주 우연히,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연을 맺는, 친밀한 아니 누군가와 친밀하고 싶은 ‘타인들’이다.
남편과의 문제 때문에 심리치료사를 찾아온 안나는 다정다감하고 참을성 있게 생긴 남자 윌리엄에게 자신의 비밀스런 속내를 죄다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인생상담가가 아니라 세무상담가였다. 돈 대신 남의 영혼을 다루게 된 윌리엄은 왠지 이 낯 모르는 여인에게 끌린다. 날이 갈수록 안나의 사생활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윌리엄은 옆방의 진짜 정신분석의를 방문하기도 하고 헤어진 옛 아내에게 자문을 받기도 한다. 마침내 사실이 밝혀지고 안나는 크게 화를 내지만, 두 사람은 이 기이한 상담 과정을 매주 반복하기로 약속한다.
세무상담가에 털어놓은 ‘안나의 사생활’
엉겁결에 상담자와 내담자가 돼버린 윌리엄과 안나 사이의 육체적, 정신적 긴장감을 잡아내는 파트리스 르콩트의 물 흐르는 듯한 편집과 연출력은 영화의 백미를 이룬다. 시종일관 한 빌딩 안에서 촬영된 화면은, 그러나 이 사실을 잊게 할 만큼 다채롭다. 특히 인물들 내부에 숨겨진 성적 긴장감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많이 보여준다는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극단까지 끌어올린다. 안나는 ‘샤워를 하다 자위행위를 했다’든가 ‘남편이 다른 남자와 자기를 바란다’는 등 낯 뜨거운 대사를 토해내지만 두 사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털끝 하나 스치지 않는다. 버나드 허먼(미국의 영화음악가로 히치콕의 영화에 즐겨 음악을 담당했다)류의 스릴 넘치는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의 눈길과 얼굴만으로도 화면은 관능으로 충만해져 부르르 몸을 떤다.
두 사람 눈길과 얼굴만으로 관능 충만
이것이 바로 르콩트의 방식이다. 스스로를 ‘고전주의자’라고 부르는 르콩트의 영화에는 유독 캐릭터와 스토리의 도드라진 흡인력으로 1950년대 시적 리얼리즘이라 불렸던 일단의 프랑스 감독들의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다.
‘친밀한 타인들’에서도 강박적인 윌리엄과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허술한 성격의 안나를 대조시키는 것은 단 몇 장면으로 솜씨 좋게 요약된다. 구두에 속을 채운다든가 간식을 먹으며 혼자 TV를 보는 사소한 장면에서도 캐릭터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 안나 역의 상드린 보네르와 윌리엄 역의 파브리스 루치니는 그 모든 내밀한 것들을 단지 몇 마디 대사와 숨겨진 표정으로 표현한다. 한마디로 영화 자체가 개인의 내밀한 환상과 욕망에 대해 관객의 귀에 대고 속닥거리는 한 편의 ‘고백서’인 셈이다.
상담을 하는 사람이 상담을 받는 사람이 되고, 남의 사생활을 몰래 엿듣게 된다는 영화의 설정은 ‘카우치 인 뉴욕’이나 우디 알렌의 ‘또 다른 여인’에서 반복됐던 소재다. 많은 영화에서 보들레르가 이야기했다는 ‘무덤처럼 편안한 소파’, 즉 카우치(상담의자)에 환자가 누우면 의사가 환자이고, 환자가 의사가 된다. 이 오래된 관습적인 소재를 감독은 유독 관음증과 연관시킨다. 사실 심리치료라는 것 자체가 돈을 받고 합법적으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관음증의 측면이 있지 않은가. 영화가 시작되면 건물의 입주민은 TV 속의 치정극을 바라보고, 윌리엄은 사무실 창문으로 호텔에 투숙한 남녀를 훔쳐본다. 이 모두가 관음의 일종이다. 인간들의 마음속 깊이 똬리를 튼 훔쳐보기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친밀한 타인들’은 편안한 안락의자에서 영화를 관음하는 것과 합법적으로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두 가지의 관음이 겹치는 지점으로 관객을 몰고 간다.
영화는 거의 대부분 윌리엄이 입주한 빌딩을 중심으로, 윌리엄의 시선으로 촬영됐다. 윌리엄의 흔들리는 마음을 카메라는 흔들리는 화면으로 담는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의 사생활을 훔쳐보면서도 안나의 말이 사실인지, 심지어 안나가 거듭 진술하고 있는 변태 취향의 남편이 진짜로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1993년 ‘탱고’가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오마주라면, ‘친밀한 타인들’의 원전이야말로 한여름에 발을 다친 사진작가가 건너편 집을 훔쳐보면서 벌어지는 스릴러, 히치콕의 ‘이창’이 아닌가 싶다. ‘친밀한 타인들’은 웃음과 스릴이 뒤범벅된 기이한 연애담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깨부순다.
남 훔쳐보는 그들 시선 결국 내면으로
상담이 진행되면서 윌리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산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꺼내 먼지를 털어 햇빛을 보게 하고 30년 이상 같은 자리에 있던 그림을 전처에게 줘버린다. 한편 안나는 윌리엄의 사무실에서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라이터를 되찾는다. 남을 훔쳐보았던 그들의 시선이 결국 내면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안나가 엉뚱한 문으로 들어선 작은 실수에서 촉발됐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인간관계가 신의 실수로 빚어지는 엉뚱한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친밀한 타인들’은 그것을 즐기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통찰을 전달해준다. 영화는 또 다른 프랑스 영화인 ‘타인의 취향’에 이어 다시 한번 타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면서 ‘친밀한 타인’이라는 제목 속에 박힌 모순의 뉘앙스로 인간관계에 부드러운 낙관을 더한다.
프랑스 영화처럼, 사랑에 대한 우아한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언제나 치유적이다.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를 만들던 80년대 이후, 뭔가에 집착하는 신경증적인 인물을 내세워 사랑의 기이함과 운명성을 즐겨 다뤘던 파트리스 르콩트가 ‘살인 혐의’의 어두움과 ‘걸 온 더 브릿지’의 서정성을 함께한 또 다른 작품 ‘친밀한 타인들’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물론 이들도 아주 우연히,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연을 맺는, 친밀한 아니 누군가와 친밀하고 싶은 ‘타인들’이다.
남편과의 문제 때문에 심리치료사를 찾아온 안나는 다정다감하고 참을성 있게 생긴 남자 윌리엄에게 자신의 비밀스런 속내를 죄다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인생상담가가 아니라 세무상담가였다. 돈 대신 남의 영혼을 다루게 된 윌리엄은 왠지 이 낯 모르는 여인에게 끌린다. 날이 갈수록 안나의 사생활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윌리엄은 옆방의 진짜 정신분석의를 방문하기도 하고 헤어진 옛 아내에게 자문을 받기도 한다. 마침내 사실이 밝혀지고 안나는 크게 화를 내지만, 두 사람은 이 기이한 상담 과정을 매주 반복하기로 약속한다.
세무상담가에 털어놓은 ‘안나의 사생활’
엉겁결에 상담자와 내담자가 돼버린 윌리엄과 안나 사이의 육체적, 정신적 긴장감을 잡아내는 파트리스 르콩트의 물 흐르는 듯한 편집과 연출력은 영화의 백미를 이룬다. 시종일관 한 빌딩 안에서 촬영된 화면은, 그러나 이 사실을 잊게 할 만큼 다채롭다. 특히 인물들 내부에 숨겨진 성적 긴장감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많이 보여준다는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극단까지 끌어올린다. 안나는 ‘샤워를 하다 자위행위를 했다’든가 ‘남편이 다른 남자와 자기를 바란다’는 등 낯 뜨거운 대사를 토해내지만 두 사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털끝 하나 스치지 않는다. 버나드 허먼(미국의 영화음악가로 히치콕의 영화에 즐겨 음악을 담당했다)류의 스릴 넘치는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의 눈길과 얼굴만으로도 화면은 관능으로 충만해져 부르르 몸을 떤다.
두 사람 눈길과 얼굴만으로 관능 충만
이것이 바로 르콩트의 방식이다. 스스로를 ‘고전주의자’라고 부르는 르콩트의 영화에는 유독 캐릭터와 스토리의 도드라진 흡인력으로 1950년대 시적 리얼리즘이라 불렸던 일단의 프랑스 감독들의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다.
‘친밀한 타인들’에서도 강박적인 윌리엄과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허술한 성격의 안나를 대조시키는 것은 단 몇 장면으로 솜씨 좋게 요약된다. 구두에 속을 채운다든가 간식을 먹으며 혼자 TV를 보는 사소한 장면에서도 캐릭터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 안나 역의 상드린 보네르와 윌리엄 역의 파브리스 루치니는 그 모든 내밀한 것들을 단지 몇 마디 대사와 숨겨진 표정으로 표현한다. 한마디로 영화 자체가 개인의 내밀한 환상과 욕망에 대해 관객의 귀에 대고 속닥거리는 한 편의 ‘고백서’인 셈이다.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기차를 타고 온 남자’(왼쪽)와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1850 길로틴 트래지디’.
영화는 거의 대부분 윌리엄이 입주한 빌딩을 중심으로, 윌리엄의 시선으로 촬영됐다. 윌리엄의 흔들리는 마음을 카메라는 흔들리는 화면으로 담는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의 사생활을 훔쳐보면서도 안나의 말이 사실인지, 심지어 안나가 거듭 진술하고 있는 변태 취향의 남편이 진짜로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1993년 ‘탱고’가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오마주라면, ‘친밀한 타인들’의 원전이야말로 한여름에 발을 다친 사진작가가 건너편 집을 훔쳐보면서 벌어지는 스릴러, 히치콕의 ‘이창’이 아닌가 싶다. ‘친밀한 타인들’은 웃음과 스릴이 뒤범벅된 기이한 연애담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깨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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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훔쳐보는 그들 시선 결국 내면으로
상담이 진행되면서 윌리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산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꺼내 먼지를 털어 햇빛을 보게 하고 30년 이상 같은 자리에 있던 그림을 전처에게 줘버린다. 한편 안나는 윌리엄의 사무실에서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라이터를 되찾는다. 남을 훔쳐보았던 그들의 시선이 결국 내면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안나가 엉뚱한 문으로 들어선 작은 실수에서 촉발됐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인간관계가 신의 실수로 빚어지는 엉뚱한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친밀한 타인들’은 그것을 즐기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통찰을 전달해준다. 영화는 또 다른 프랑스 영화인 ‘타인의 취향’에 이어 다시 한번 타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면서 ‘친밀한 타인’이라는 제목 속에 박힌 모순의 뉘앙스로 인간관계에 부드러운 낙관을 더한다.
프랑스 영화처럼, 사랑에 대한 우아한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언제나 치유적이다.